May 23, 2004
하루 동안의 소동
자식이 많아서 우리 엄마는 꽤 번거롭기도 할게다. 무슨 일이 생기면 5명이나 되는 자식들한테 일일이 다 연락할 수도 없고 똑같은 얘기를 다섯 번이나 되풀이하려면 얼마나 고역스러울까. 그렇다고 일년에 두 세번 다 같이 모이기도 힘든 상황이니 상황이 룰을 만든다고, 우리 집도 이제는 나름대로의 연락체계가 잡힌듯하다. 최초의 연락책이었던 사람은 셋째 언니. 전업주부인데다 아이가 하나였을 때는 대개 그 언니가 엄마의 전갈을 받아 나나 둘째 언니에게 연락을 하고, 그럼 나는 막내나 다른 형제에게 연락을 취하는 시스템이었다. 걔 중에는 엄마 입장에서는 자식들이 몰랐으면 했을 은밀한 정보들도 오갔다. 가령 부모님의 부부싸움 얘기 같은 거.
그런 얘기들은 항상 앞에 단서가 붙은 문장들로 형제들에게 전해진다. " 엄마가 너한텐 말하지 말랬는데.. 요새 엄마 좀 우울한가 봐. 아버지랑 다투셨대" 이런 식으로 말이다. 헌데 연락책 역할을 하던 셋째 언니에게 아이가 더 생기고, 육아를 비롯...주부로서 해야할 일들이 늘어나면서 엄마는 나를 먼저 찾는 일이 부쩍 늘어났다. 처음에는 으례 하시는 전화겠거니, 언니들도 다 알고있는 내용이겠거니.. 나혼자만 얘길 듣고 말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쩌다 언니랑 통화하다가 " 엄마.. 다리 괜찮은지 모르겠네" 언니 "엄마 다리가 왜?" 나 "병원 다녀오셨다는데, 언니... 몰랐어?" 언니 " 얘길 해야알지... 그 얘길 왜 이제 하냐?" 그러니까 어느샌가 엄마는.. 바빠진 셋째 언니의 뒤를 이어...나를 형제들 간의 연락책으로 임명하셨던 거다. 근데 문제는 내가 부모님의 일에 관해서는 유난히 과장이 심하다는 건데, 어제 아침에도 엄마는 전화를 하셔서 당신들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주셨다. 아버지가 요즘 부쩍 식사량이 줄었다는 것. 오늘은 어디가 편찮으신지 아침식사도 안하시고 누워계시다는 것. 엄마도 허리통증이 심해져서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한테 더 신경을 써드리라고 엄마에게 당부를 하고 저녁에 동생과 셋째 언니에게 전화를 돌렸다. '지난 주말에 가서 보니 아버지가 부쩍 마르셨고 오늘은 무슨 일인지 식사도 거르시고 누워계시다고 한다.엄마도 병원에 가신다고 했고 두분 상황이 많이 안좋다 ' 며칠 전에 내가 꾸었던 흉흉한 꿈까지 보태서 과하게 격앙된 어조로 언니들의 각성을 촉구했다고 할까? 암튼 언니와 통화를 끝내고 30분쯤 지난 후에 집에 전화를 했더니 아버지는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대뜸 그러신다. " 괜찮다니까. 피곤해서 그런 거야. 오늘따라 참 이상들 하네..." 더불어 엄마는 누군가 다른 아주머니 집에 놀러가셨고 동생은 집으로 달려오는 중이라고 방금 전화가 왔노라고 하신다. 내가 전한 말이 삽시간에 형제들 사이에 퍼져서 다들 전화 한통씩 돌려서 '몸이 어디가 안좋으시냐' '식사는 왜 안하시냐' 똑같은 질문들을 퍼부어댔다는 얘기다. 우리 집의 두번째 연락책 나. 알고보면 선동적인 스타일이라 우리 형제들 가슴 쓸어내릴 일이 꽤 생길듯 싶다.
in Diary 2004Posted by nuncoo at May 23, 2004 05:33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