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재료상

이 동네에 산지 1년 6개월이 지났는데도 동네 수선집에 구두를 맡겨보기는 처음이다.
머리도 미용실 따져가면서 멀리 나가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동네에서 해결하고 
먹는 것도 멀리 나가자면 월중계획을 잡아야 하는 게으른 천성인데 이상하게도 동네구두 수선집에는 들른 기억이 없다. 당연하다. 수선할 구두가 없었다.

적당히 나이 들고 수선기술자로서의 노련미가 뚝뚝 흐르는 주인을 기대했던 것일까?
왠지 쇠락의 기운이 감도는 옹색한 수선집에 손님도 없이 앉아있는 주인할아버지를 보니 구두가 든 종이가방을 선뜻 내주고 싶지 않아진다. 이런 뒷굽이 있겠냐는 질문에 '재료상에 가면 다 있다' . '날렵한 구두굽이 생명이니 흉물스런 통굽같은 걸 대면 안된다' 불안해서 덧붙이는 말에도 할아버지는 '재료상에 물어보면 비슷한 걸 찾아준다'며 재료상을 앞세운다.
귀찮아한다기 보다는 자신을 허툰 동네 할아버지쯤으로 보는 내 불안해하는 태도에 못을 박으려는 의도로 읽혀진다.
허나 나는 '할아버지'가 '재료상'을 발음 할 때 칠순의 우리 엄마가 'H.O.T'를 발음할 때 같은 어색함을 느낀다.
활자로나 눈에 익혔던 어려운 단어가 입 밖으로 처음 발설될 때 내가 느끼는 낯설음과 어색함과 비슷하달까?
'할아버지한테 '재료상'이라는 말은 왠지 이질적인 느낌이야 ..'라는 생각에만 골몰하느라 얼떨결에 종이가방을 내려놓고 수선집을 나선다.
할아버지는 내일은 재료상에 가봐야 하니 모레저녁 쯤에나 찾으러 오라는 말을 덧붙인다. 할아버지는 재료상을 너무 강조하셔.

비 오는 창밖을 보며 뾰족한 구두뒷축이나 굽이 시렁마다 가득한 재료상을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내 구두에 이런 저런 굽을 맞춰보다가 '이 집엔 왜 이렇게 제대로 된 물건이 없어? ' 호령이라도 치실까?  백발이 성성한 모습이라면 더 그럴듯할텐데.. 상상도 좋지만 너무 멀리 갔다. 그다지 할아버지도 아니었는데, 단지 내 예상보다 조금 허술해 보였을 뿐인데 자꾸 재료상을 강조하시니 오늘밤엔 그만 '재료상'이라는 말에 꽂혀버렸을 뿐.

in Diary 2004
Posted by nuncoo at November 1, 2004 11:45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