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13, 2005
꽃을 주세요
메모지며 볼펜이며 소지품을 올려놓던 문갑 위에 엄마는 난 화분을 한 개 들여놓으셨다.
나는 대형마트에서 미니 수선화와 페퍼민트 화분 하나를 사왔다. 시골에서 자란 아이답게 한 때는 자칭 :) 걸어다니는 식물도감이라며 뻐기고 다녔는데 식물을 키우는 데는 인연이 없는지, 집안에 들여놓는 것마다 제 수명대로 살아남은 것이 없었다. 여러해살이 풀도, 한해살이 풀도 내 집에만 들어오면 몇 달을 못 넘겼다. 웬만하면 죽지 않는다는 선인장도 두어 달 만에 주저앉아 버렸다.
사랑은 마음만 갖고는 안 되는 일이었다.
사온 지 일주일도 안되어 1천 8백원짜리 미니수선화에 꽃이 피었다. 
김수영의 시가 생각났다.
꽃 잎 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 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 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 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싫은 노란 꽃을.
드러난 수선화의 알뿌리
페퍼민트
Posted by nuncoo at March 13, 2005 11:58 PM
jhin-조숙한 고등학생이었네요. 저는 딱 스무살 때 '2'를 먼저 알았지요. 1보단 2와 3이 좋지만, 처음 느꼈던 2의 충격이 더 오래 가네요 :)
67년 5월 7일 作이라고 전집에 나오네요.
고등학교 때 그의 전집을 성서처럼 가지고 다녔답니다.
꽃잎 3연작 중 하나이죠...
3연작을 같이 읽으면 느낌이 전혀 달라지죠?
김수영의 詩 반가워요! :)
나는 한 게 없다. 물도 딱 한 번 주었을 뿐인데 저렇게 꽃이 피었네.
Posted by: nuncoo at March 14, 2005 03:20 AM혹시, 언니가 키우는 화분들??
우아, 넘 이쁘네요. 시와 넘 잘 어울려요.
김수영 시인이 이런 느낌의 시도 썼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