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에서

머리를 하러 갈 때는 더 공들여 머리단장을 하고 나간다. 지금 상태가 이러하니 미용실을 나갈 때는 더 괜찮아져서 나가야 한다는.. 미용사샘에 대한 압력이다. 옷을 사러 나갈 때도, 구두를 사러 갈 때도 되도록 뽀대나는 차림을 하려고 신경을 쓰는 편이다.
하지만, 몇 년 만에 치과에 다니면서는 화장도 안 하고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어슬렁거리며 나간다. 치과에서는 입만 벌리면 만인이 평등하다. 명품가방 하나 안 들었다고 해서 명품샵에서처럼 쭈뼛거릴 이유도 없고, 위아래를 훑는 시선에 불편해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치과에 가면 몹시 불편하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나는 이런 사람이요, 이렇게 되는대로 먹고살아 왔소...' 막무가내로 살아온 삶을 속속들이 내보이는 느낌. 그리곤 입을 더 크게 벌리라는 주문에 따라 온 힘을 다해 입을 벌리고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은 잠시 잊으려 애쓴다.
그래도 생각은 멈출 수 없으니 어떡하나.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내 이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걸 느끼며, 간호사와 의사의 시선이 입을 쫙 벌리고 누워있는 나의 얼굴에 집중돼 있는 걸 느끼니 치욕이랄 것까지야 없지만 부끄러움은 어쩔 수가 없다.
이럴 때 감고 있던 눈을 확 떠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좀 놀랄까?
힘 빼라고 몇 번이나 주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려 보면 발끝부터 손끝까지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어떤 땐 잔뜩 긴장해서 한껏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제 입 다무셔도 됩니다." 하는 소리도 놓치고 말았다. 오래 벌리고 있어서 얼얼한 것보다 그러고 있었던 게 부끄러웠다. 아, 치과에서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데 더는 뻔뻔스러워지지 못하겠다.

첫 번째 간 날. 마스크 벗은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는 그 의사는 내가 앞니를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했다.
양치질을 험하게 한 탓에 잇몸이 밀려 올라가고 치아가 많이 드러나 있다. 이건 성격이 급한 탓이다.
점쟁이를 대하듯 나는 하마터면 부끄러움도 잊고 '그것 말고 저의 식생활이나 음식 먹는 습관, 성격 분석도 좀 해주실래요? 하고 물을 뻔했으나 잘 참았다.
전에 다녔던 치과에서는 입만 남겨놓고 얼굴에 가운을 덮어주던데 이번 치과는 그런 것도 없다.
그래서 매번 의자에 누워있을 때마다 잠시 고민한다. 의사는 분명히 눈 감으라는 얘기는 안 하던데, 눈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입 쫙 벌리고 눈까지 동그랗게 뜨고 있으면 그건 좀 웃길까?

in Diary 2005
Posted by nuncoo at April 6, 2005 01:25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