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

'스승찾기 서비스- 선생님을 찾아보아요' 를 읽고.


절박했던 순간의 기억은 시간이 오래 흘러도 잊히지 않나 보다.
선생님의 이목구비는 이미 희미해진 지 오랜데 그날 밤 가까스로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하늘을 환하게 밝힌 대보름달을 보며 떠올렸던 생각, 아니 그 느낌만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 아, 이렇게 죽나 보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를 담벼락에 기대놓고 선생님이 주인집 사람들을 깨우러 갔을 때 나는 가지 말라고 하던 엄마생각도 잊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기승전결도 알지 못한 채 '아, 이렇게 죽나 보다' 그런 생각만 했던 듯 싶다.
그때는 중학교 2학년.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언니 같았던 미술 선생님은 전시회준비로 바빴고 그날 나는 인물화를 주로 그리는 그 선생님의 모델이 되어주기로 되어있었다. 모델이라고 해봐야 밤새 그림을 그리는 선생님 옆에서 과자를 먹거나 책을 보다가 고개 좀 들어보라고 하면 잠시 무료하게 앉아있는 게 다였는데 그러다가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자던 아이가 화장실 가겠다고 비척비척 일어나더니 방문을 열자마자 방 옆에 딸려있던 부엌으로 그대로 고꾸라지더란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선생님 자취 집의 주인아저씨가 달려나오고 동치미국물 같은 것이 입안으로 넘겨지고 찬바람이 계속 나를 깨워서 눈을 떴을 때 그 명랑하던 선생님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가 조금이라도 재치있고 싹싹한 아이였다면 '선생님 조금만 비켜주세요. 달빛이 가려지잖아요' 라고 말해서 선생님을 웃게 했을 텐데 지금 생각해봐도 난 참 촌스러운 아이였다.
그 소동을 벌이고도 다음날 난 선생님의 그림이 시외버스 짐칸에 실리는 것까지 보고 돌아왔다.
상처만 없었어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 있었는데 부엌바닥에 넘어지면서 얼굴에 찰과상을 입는 바람에 부모님 사이에서 약간의 잡음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중학교 입학 후 첫 미술시간에 '너 미술반 와라'라고 나를 꼬드겼던 선생님. 일요일이면 미술반 아이들을 몰고 산이며 바다로 놀러다니기 바빴던 선생님. 엄청 시끄러웠고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운 것도 없이 참으로 살가웠던 선생님. 몇 년에 한 번씩 선생님을 떠올릴 계기가 생겨서 그때마다 찾아보려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연결이 되지 않는다.

중학교 때는 채 알지 못했던 '해방전 여류작가 선집'이라는 책을 뒤늦게 사게 된 것도 우습지만 선생님 때문이었다.
범조사에서 나온 Short Book 시리즈 68번째로 나온 이 책에는 강경애의 해고(解雇), 산남(山男), 지하촌(地下村) 세 작품이 실려있는데 
내 중학시절에 활기를 주었던 그 명랑한 여인, 선생님의 이름도 강경애였다.

‥이 시절의 이야기는 예전에도 한번 쓴 적이 있다.

‥국가 교육통계정보센터의 스승찾기 서비스  (via Rebirth Minse)

in Diary 2005
Posted by nuncoo at May 13, 2005 02:15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