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인 가을

'지상의 모든 열매는 꽃같던 날의 추억인 거라' - 이재호 시 '11월의 감나무 ' 첫 연.

내 것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헛 것만 붙잡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 .


스스로를 위로한답시고 기댄 것조차 남이 건네준 깨달음일 때.


그 한 줄에 목 매달고 여러 날을 버티다가도 다리에 힘이 풀려 풀석 넘어지고 말 때.




흉내내는 위악이 한 눈에 봐도 알아볼만 할 때.


말이 겉돌 때.


치장이 많아질 때.


고독의 내용보다는 고독의 독창적인 폼새를 먼저 계산하고 있을 때.

남의 시선, 남의 생각에만 기생하며 살아온 것이 뼈에 사무치게 느껴질 때.




가령 오늘 낮에 찍은 저런 사진만 해도


그대들이나 나나 아무리 독창적인 자세로 은행나무에 카메라를 갖다댄다 하더라도.
자동차 매연을 참으며 노출과 셔터속도에 목숨을 건다 하여도 결국은 상투적인 가을.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
수십 년 동안 세뇌된 똑같은 가을.



나는 사실 종일 은행나무의 일렁이는 노랑빛을 보고도 하나도 설레지 않았다.
사진들을 클릭하다 보니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나'는 내팽개친채 세뇌된 이미지만 찾았다.


내가 '나'였던 순간은 남산공원에서 어떤 모녀를 보던 순간 뿐이었다.
아이를 국화 화분 옆에 세워놓고 잰 걸음으로 달려간 엄마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아이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지 몰라 노란 국화 옆에 서서 얼굴만 빨개졌다.
자세를 고쳐주고 다시 돌아가고 엄마가 몇 번을 왔다갔다 하는 동안
아이의 얼굴에서는 봄,가을이 다 지나갔다.
상투적이지만 아름다워서 오래도록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 풍경은 내 눈에만 담고 고작 담아온 것이 달력 사진 같은 낙엽이라니.

블로그, 미니홈피마다 잠언으로 치장한 단풍사진들이 울긋불긋할 날도 머지 않았다. 

 

in Diary 2005
Posted by nuncoo at October 30, 2005 12:13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