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박사가 사랑한 수식 | 원제 博士の愛した數式 (2004) 오가와 요코 (지은이), 김난주 (옮긴이) | 이레


책을 잡자마자 단숨에 한 권을 다 읽어버리긴 쉽지않은데, 이 책 덕분에 오랫동안 잊고있었던 '단숨에'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잠들기 전에 몇 페이지..를 염두에 두고 폈다가 도저히 책을 놓을 수가 없어서 ..누웠다, 엎드렸다, 모로 누웠다..침대에 기대앉았다를 반복하며 박사와 파출부와 루트가 함께 있는 풍경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그들이 교감하고 정을 나누는 풍경이 참으로 평온하고 아름답더라.
가령 나는 박사의 양복에 새파출부와 그 아들 열살..루트에 관한 메모지가 펄럭거릴 때라든지,
정수리가 루트기호처럼 평평한 아이에게  "너는 루트다. 어떤 숫자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 루트야" 라고 할 때..
혹은 젊은 파출부 그녀에게  '음식을 만드는 자네 모습이 좋아'라고 할 때는 내 가슴도 자주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은 루트가 여름캠프를 떠난 뒤에 예순네 살의 노수학자와 스물여덟 살의 미혼모 파출부가 나란히 앉아 저녁이 기우는 모습을 바라보는 풍경이다.

(중간중간 내 맘대로 생략) 루트가 없으니 라디오를 켤 일도 없어 사방이 조용했다. 안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매미가 우는가 싶더니 금방 잠잠해졌다.
......  갑자기  나뭇잎들이 쏴쏴 소리를 내더니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졌다.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울렸다.

커튼이 흔들릴 때마다 빗방울이 뿌려 두 사람의 맨발을 맨발을 적셨다. 나무들 사이에 앉아있던 새들이 날아오르고, 뒤엉킨 나뭇가지들이 휘고, 마침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비에 덮였다. 흙 냄새가 올라왔다.  스물여덟 살의 미혼모인 파출부는 노수학자의 바짓단이 젖지않도록 바짓자락을 걷어주면서도 캠프를 떠난 아들이 걱정이다.

" 루트가 없으니까 왠지 가슴이 텅 빈 것 같아요."
" 텅 비었다는 것은, 즉 0을 뜻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지금 자네 안에는 0이 존재하는 셈이로군."
"네, 그런가 보네요."
" 0을 발견한 인간은 위대하다고 생각지 않나?"
여전히 비는 쏟아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리다 천둥소리에 지워졌다.
" 그러나 0의 경이로움은 기호나 기준일 뿐만 아니라, 명실상부한 숫자라는 점에 있어. 가장 작은 자연수 1보다 1만큼 작은 수, 그것이 바로 0이지. 0이 등장했다고 해서 계산 규칙의 통일성이 흐트러지는 일은 없어. 아니 오히려 질서가 견고해지지. 모순도 없어지고 말야.
자, 한번 상상해봐. 나뭇가지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고운 소리로 지저귀는 새야. 부리는 귀엽고 날개에는 예쁜 무늬가 있지.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는 순간, 새는 놀라 날아가 버리지. 나뭇가지에는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 그저 마른 잎이 흔들릴 뿐.
1-1= 0
아름답지않나?"
박사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우르릉 쾅쾅, 천둥소리에 땅이 흔들렸다.
나는 그의 양복 소매를 꼭 잡았다.
"괜찮아, 안심해도 돼. 루트 기호는 튼튼해. 모슨 숫자를 보호해주니까."

단숨에 읽고,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세계에 고요하게 젖어버렸던 나는 차마.. 박사야 말로 최근에 내가 발견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림만 잘 그릴수 있다면 ..양복 가득 메모지를 펄럭거리며 생각에 빠진.. 박사를 그림으로 그려볼 텐데.
뇌속에 80분짜리 비디오테이프가 딱 한 개 들어있는 것처럼 80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그래서 볼 때마다 '자네는 생일이 몇일인가"  " 태어났을 때 몸무게는?" 이라고 묻는 아름다운 노수학자는 확실히... 따뜻한 동화에나 나올법한 인물이라 실사보다는 그림이 어울린다.
그래서 실은 영화로 만들어진 '박사가 사랑한 수식' 스틸사진을 보고 많이 실망했다. 나는 '키다리아저씨'같은 .. 조용한 후견인 혹은 은둔형 천재같은 박사의 모습만을 상상했나 보다.


단숨에 읽고말았던 그날밤의 희열은, 소설 속의 표현을 빌자면 '갓 발효가 끝난 반죽처럼 보들보들'해서 그 안에 손가락을 파묻은채 마냥 있고 싶었는데.. 오래 갈 줄 알았던 그 느낌도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희미해졌다. 
지금은 그저... 비 들이치는 마루 쪽에 나가 앉아 삽시간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텅 비어 아름다운 숫자 '0'을 이야기하던 그 풍경 속에 나도 고즈넉하게 끼고 싶을 뿐.

수학잡지의 현상문제를 풀어 리포트용지에 깨끗하게 옮겨 쓰고서 다시 한 번 훑어볼 때면 박사는 자신이 도출해낸 해답에 만족하면서 중얼거렸다.
" 아아, 조용하군."
정답을 얻었을 때 박사가 느끼는 것은 환희나 해방이 아니라 조용함이었던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장소에 정확하게 자리하여, 덜고 더할 여지 없이 오랜 옛날부터 거기에 한결같이 그렇게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있으리란 확신에 찬 상태, 박사는 그런 상태를 사랑했다.

in 책읽기
Posted by nuncoo at January 1, 2006 06:12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