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첫 만남

첫 만남 - 최윤 (지은이) | 문학과지성사


오랜만에 최윤의 소설을 잡았으나 진도를 못나가고 있다.
따라갈만한 사건이 딱히 없고 줄거리조차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 '그 집 앞'부터 곤혹스러웠다.
촘촘하고 길게 엮인 문장이 부담스럽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이어나가기가 버거워서 늘 읽던 자리만 맴돌다가 다시 앞장으로 가 보면 내가 과연 이 부분을 읽기는 읽은 건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 정도는 아니라서 이제 막 네 번째 작품인 '굿바이'까지 지나왔다.

그 중에 가장 선명한 이야기 -'밀랍호숫가로의 여행.'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남편은 낯선 집에 나를 부려놓고, 설명 하나 없이 다시 떠났다. 우리 부부는 젊은 시절부터 '다복한 부부'라고 칭찬 받을만큼 탈 없는 부부였다. 같은 약국에서 일하다가 만나서 결혼을 했고 열심히 돈을 모아 약국을 차리고 독립을 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더러 더이상 '다복한 부부'라고 부르지않는다고 해서 마음 상할 것도 없는 나이에 다다랐다. 약국을 처분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남편이 친구의 꼬임으로 시작한 주식투자가 잘 안되서 약국을 팔게 됐어도 남편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늙어가고 있었고 더 심한 경제여파가 닥치기 전에 약국을 처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3년전 나는 비로소 단 한 순간도 믿지않았던 딸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내가 딸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불치의 병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배우는 것 중의 하나는 자신에 대한 어떤 분명한 지식도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나를 남편은 여기까지 데려왔다. '당신의 고향과도 가까운 곳이라 당신도 좋아할 것이라'며. 그리고 전화 한 통을 받고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흘만에 돌아온 남편은 수면부족으로 까칠해진 얼굴을 들어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한다. " 아기가... 태어났어."  약국을 팔기 전에 잠깐 일했던 젊은 후배 약사의 이름이 예순이 넘은 남편의 입에서 어렵게 어렵게 흘러나온다.  '아기가.. 태어났어.아이 엄마는 선자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무런 감정 없이 이런 문장이 떠오른다. 슬픔도 서운함도 없이. 마취에서 막 깨어난 후의 거의 개운하기까지한 야릇한 느낌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나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들을 세상 사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해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젊은 약사가 해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기이하고 억울할 것도 없다.고 나는 결론 내린다. 이런 일이 10년 전에 일어났다면?
그러나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가정이 인생에서 요긴하게 쓰일 때는 참으로 드물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in 책읽기
Posted by nuncoo at April 7, 2006 11:43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