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k Moon: 빈 방에 달빛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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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2, 2005

빈 방에 달빛 들면

예나 지금이나 남편 노릇, 아내 노릇하기가 쉽지않겠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여인들도 많았나보다. 가령 이런 아내.

"평소 내가 술을 좋아해 가끔 손님을 맞을 때면 당신은 먼저 주안상부터 차려 내오고는 술이 떨어지지 않게 했소. 내가 서화를 좋아해 가끔씩 사고 싶어하면, 당신은 치맛감을 잘라 팔고 다리(숱이 많아 보이게 덧넣는 머리)를 팔망정 돈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소. 내가 매화와 대나무 감상하기를 좋아하자, 당신은 내가 집에 없을 때도 손수 심고 가꾸었소. 내가 산수를 유람하고 싶어하면 당신은 경치를 구경할 채비를 해주며 먼 길 떠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오. 새 집을 마련하느라 살림이 말이 아닌데도 쌀궤가 비었다는 말로 나를 심란하게 하지 않았고, 무능하다고 나무라지도 않았소 (이해조)"

"내게 두 명의 첩이 있었는데, 당신은 그들을 가까이하고 아껴 아무도 불만이 없었소. 두 사람이 아들을 하나씩 낳았을 때도 당신은 희색이 만면하여 " 이 아이들은 당신 피붙이니, 내가 낳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라고 하며 품에 안고 돌봐주었소. 그러다 한 아이가 여덟 살에 죽자, 애통해 하며 두 눈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소. (채제공)"

이들이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온 이력들을 읽다보니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도 못내겠거니와 제도와 풍습에 눌린 그들의 갑갑한 삶이 애처롭기만 하다. 그리고 이런 남편.

"중년에 배우자를 잃는 것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고들 하오. 이는 부부의 정이 매우 깊어져 잊지 못해서이고, 게다가 위로 어머니가 보살펴주시지 못하고 아래로 며느리의 봉양도 받지 못한다면, 남자 혼자서 의식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요. 아내 없는 자는 이럴 때가 제일 궁해서 내가 홀아비들을 불쌍히 여겨왔는데, 오늘 같은 불행을 내가 당할 줄 어찌 알았겠소. 고단해진 내 신세는 괴로워도 의지할 데조차 없구려.
아들이 하나 있지만 아직 어려 걱정거리만 되고 있으니, 무슨 수로 나를 봉양하겠소. 내 신세를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흐르는구려.(박윤원)"

"당신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하지만, 내 운명은 당신에 비해 더욱 기구하다오. 나는 홀아비가 되어 배가 고파도 밥을 줄 사람이 없고, 추워도 따뜻하게 해줄 사람이 없고, 제사 때에도 맡아 해줄 사람이 없소. 벗을 만나도 상을 차려줄 사람이 없고, 병이 들어도 돌봐줄 사람이 없고, 우환이 있어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소. 사는 게 이 모양이니 무슨 재미가 있겠소. 그러니 원통하고 슬픈 내 심정이 어디 끝이 있겠소. 오호통재라! (신경)"

죽은 아내 영정을 놓고 신세한탄이나 하면서 엄살을 떠는 선비님네들을 보니 내 속이 터지고 미깔맞아 죽겠다. 오호통재라.

그래도 부부간의 정이 느껴져 애틋한 대목도 있으니

" 지난날 당신과 내가 죽서의 고향집에 있을 때, 사시사철 밤낮으로 마주 앉아 마음을 터놓기도 하고, 아이를 가르치기도 하고, 책을 베껴쓰기도 하
고, 그림을 보기도 하고, 달을 바라보기도 하고, 꽃을 감상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투호도 함께 하며 즐겁게 지내느라 세월 가는 줄 몰랐는데, 이제 어떻게 다시 그럴수 있겠소. 당신의 눈썹과 눈, 입과 귀, 음성, 웃는 모습, 그리고 지향하던 것과 좋아하던 것, 충고해주고 경계해준 말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으니, 어떻게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소. (신경)"

이런 대목에서는 잠시 마음이 누그러졌다가 그래도 가여운 조선의 여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쓰러워

" 자네가 많이 아플 때, 마침 사신이 국경에 와 있어 나는 그들을 접대하느라 분주해 자네를 돌볼 수 없는 것이 매우 한스러웠네. 그러니 국경 밖에
서 그들을 수행하고 있을 때야 말해 뭐하겠는가. 자네는 나를 만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도 자네의 병이 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네. 자네는 나를 말없이 쳐다보며 눈물 흘리다 내 손을 잡고 " 다시는 못 뵙겠지요?" 라고 하고는 더이상 아무 물도 하지 못했네. 자네는 내가 떠난 지 3일 만에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네 (이시발)"
'다시는 못 뵙겠지요?' 이 한 마디에 슬쩍 눈물을 비치고 말았다.



빈 방에 달빛 들면
- 조선 선비, 아내 잃고 애통한 심사를 적다 (학고재)

조선 선비들이 아내와 사별하고 지은 제문.. 마흔 아홉편을 모은 책.
제문이라 글의 정체를 밝히는 서두, 아내의 이력을 회상하거나 공덕을 그리는 본문내용, 죽어서도 지각이 있다면.. 운운하며 '오호애재라', 혹은 '오호통재라, 상향'으로  끝나는 마무리까지 구성이 거의 비슷비슷하고 동어반복이 많다.
책을 핑계로 마음놓고 비통에 젖어보려 했으나 난리통에 아내를 잃은 조찬환, 황신 등의 글에서나 잠시 먹먹했을 뿐, 집안일에는 관심없이 밖으로만 떠돌다가 마누라 죽고나니까 제사는 누가 챙기나 ... 내 밥은 누가 해주나.. 이런 걱정만 하고 있는 선비들이 괘씸하고 미워서 슬퍼질 겨를도 없다.

 

in 책읽기
Posted by nuncoo at May 22, 2005 04:28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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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daybreak_ 눈물반,괘씸반이니
눈물 몇 방울 흘려주다가 욕하는 맛도 괜찮아요.

Posted by: nuncooo at June 16, 2005 01:10 AM

읽어보고싶은 마음이 있는 책이었는데 블로그 글을 보니 선비들이 괘씸하단 생각만 드네요.ㅋㅋ

Posted by: daybreak_ at June 16, 2005 12:49 AM

다들 대단하셩.
.....놀라고 가는중

Posted by: honeymom at May 22, 2005 09:3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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