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k Moon: 오래된 창문 열기 혹은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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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03, 2005

오래된 창문 열기 혹은 닫기

따위님의 오래된 창문 열기, 혹은 닫기, 닫아 버리기 에 호응하여.


어릴적 제가 쓰던 방에도 상우네 식탁머리에 있던 것만한 창이 있었드랬죠.
손을 내밀면 모기장보다 조금 성긴 방범창 방충망 구멍에 손가락이 딱 걸려버리던 그런 창.
창 밖을 바라보던 소녀의 꿈을 우리 엄만 몰랐드랬죠.
나팔꽃도 안심어주고요 레이스 달린 커텐도 안달아주고 소녀의 창은 청춘의 담배 없이도 심란했드랬죠.

창 밖에 복사꽃이 흐드러지는 꿈은 누가 꼬드긴 건지 나도 몰라요.
고작 열 살 넘은 계집애가 뭘 알았겠어요.
살을 잘 발라먹은 복숭아씨만 창 밖에 던졌드랬죠.
더 큰 언니들과 '감자가 싹이 나서 잎새가 감자감자 짱깸보!'도 했고요. 
짱깸보를 골백번 이겨도 복숭아씨가 싹이 나서 잎새가 복숭복숭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드랬죠.
언니들 몰래 뒤뜰에 나가 복숭아씨에 흙도 덮어뒀단 얘긴 차마 말 못해요.
복숭아씨가 싹이 나서 사람 속만 태우다가 잎새가 질경이가 되거나 코스모스가 되는 이치는 아직도 모르겠다고 고것도 말 못해요.

어릴적 제가 쓰던 방에도 작은 창이 있었드랬죠.
너울대는 잎사귀로 소녀의 잠을 간질이는 나무는 없었고요.
바람 부는 밤이면 흙에 얼굴을 비비며 복숭복숭 싹을 피워보려고 애를 쓰는 착한 복숭아씨가 창 아래에 있었드랬죠.
그 착한 복숭아씨를 잊게 된 건 일찍 자란 소년 때문이었고요.
창 밖에 서성거린 소년의 발자국에 호들갑을 떠느라 그날 이후로 불쌍한 복숭은 영영 잊혀지고 말았지만 열 몇 살 그맘때는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복숭아처럼 수줍지만 어느새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나이잖아요.
하도 오래된 일이니 그러려니 하는 거예요.
지금도 어느날은 십수 년 된 아름드리 복숭아나무들이 창 밖에서 복숭복숭 일렁이는 소리를 들어요.

하기야 누군들 창 밖에 그런 착한 나무 한 그루 없겠어요.


in Diary 2005
Posted by nuncoo at August 3, 2005 02:29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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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제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 시골집엔 창이 참 컸어요.
제 키보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냇가도, 들도, 산도 다 들어왔었는데...
이제는 다시 찾기가 힘든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서울이란곳...
살아보니 참 다른 생각이 많이 들게 하는 곳이더군요.
더운날... 맑게 개인 인왕산 자락 보면서
옛날 시골서 산속을 헤짚고 다녔던 그 소년이 그립습니다.

Posted by: DoshRock at August 5, 2005 08:29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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