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k Moon: 돈키호테-슬픈 표정의 기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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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06, 2005

돈키호테-슬픈 표정의 기사여


나라는 뭐 스페인일 테고, 동굴인지 지하인지 모를 어느 음산하고 무서운 감옥.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 세르반테스는 정식재판에 앞서 감옥 안의 다른 죄수들에게 먼저 죄를 심판 받아야 할 입장이다.  
감옥의 왕초쯤 되어 보이는 이는 묻는다.
" 너는 무슨 죄를 지었느냐? "

" 나의 죄는 당신들도 알다시피 이상주의자에, 형편없는 글쟁이...
하지만 이상 없이는 살 수 없고, 형편없는 글쟁이라... 그건 좀 복잡하군요."

슬픈 이상주의자 세르반테스는 이렇게 해서 자신이 쓴 '돈키호테'를 감옥의 죄수들과 함께 극으로 꾸민다. 극중 극으로 나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돈키호테고, 전체 극을 이끄는 것은 작가 세르반테스다.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기사가 사라진 시대에 기사의 꿈을 쫒던 돈키호테는 알돈자, 아니 그의 레이디-둘시네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고, 세르반테스는 알돈자의 입을 통해 돈키호테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며 꿈이 없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는 역시나 재판정으로 불려 나간다.

언니가 조카 둘을 데리고 가서 같이 봐달라고 부탁했을 땐 사실 썩 내키지않았다. 중학생인 아이들한테는 너무 어려운 작품이 아닐까 싶었고, 나에게 '돈키호테'는 너무나 식상한 이야기였으니까. 국립극장으로 가는 동안 언니는 아이들에게 '이모 있어서 좋겠다'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는데, 뮤지컬을 보고나서는 내가 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좋은 거 보게 해줘서 고맙다'고.
오늘은 한 차례 공연밖에 없었는데 빈 좌석은 거의 없었고,  공연이 끝난 후 홀에 모인 관객들은 시간이 흘러도 떠날 줄을 몰랐다.

나도 너무나 감격에 겨워 세트를 배경으로 해서 사진이라도 한 장 박고 싶었는데 감시가 삼엄해서 엄두를 못냈다. 그래도 굴하지않고, 꿋꿋하게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더라.

.무대 디자인은 장면이 바뀔 때마다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삭막하고 더러운 감옥이었던 곳이 돈키호테가 성이라고 착각하는 남루한 여관으로, 해바라기가 만발한 평원으로,또 동네 빨래터로 ..자유자재로 변한다.
큰 틀은 바뀌지않은 채 크레인 한두 번 쓰고,  소품만 몇 개 바꾸는 걸로 말이다. 조카들은 알돈자가 빨래를 할 때, 냇가에 진짜 물이 흐른다며 신기해했다. 다만, 배우들은 연기하랴, 표 안나게 슬쩍슬쩍 소품 옮기랴 무대 위에서 정말 바빴겠더라.

.알돈자가 사내들한테 윤간을 당하는 장면과 집시들이 돈키호테를 춤으로 유혹하는 장면은 너무 노골적이라 중학생 조카들과 같이 보기엔 당혹스러웠다. 카우치의 성기노출 장면도 안본 아이들인데 충격을 받거나 수치심을 느끼면 어떡하나 ... 걱정됐지만  돌아보진 못했다. 내가 더 민망해서 아이들의 반응을 살필 겨를도 없더라.  참고로 이 뮤지컬은 만 7세 이상 관람가이고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가 불쾌했다는 의견이 여럿 있었다.

.살짝 눈물이 맺힐 뻔한 장면도 있었다. R석에서 봤다면 흐느낌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눈가를 촉촉히 적시는 눈물 두어 방울.정도는 가능한 수준의 감화였다.
눈물의 원근법-자리가 무대에서 멀면 멀수록 감동의 선명도도 떨어지는 법이다.
살포시 눈물 한 방울 떨구고 싶은 사람은 페밀리 레스토랑 한번 덜 가고 앞으로 가자.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 눈물 살짝이었는지 나에게 이야기해달라. 나랑 같은 장면이었다면 우리, 밥 먹자.

.조카들은 책에서 본 내용과 좀 다르다며 감상문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하는 눈치다. 나는 이미 원작이 어땠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당분간은 뭐 오늘 본 뮤지컬의 세르반테스, 돈키호테로 기억해도 그만.
'이루지 못할  꿈을 꾸고
이길수 없는 적과 싸우고
참을 수 없는 슬픔을 참고
갈 수 없는 곳을 향해 달리고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해 손을 뻗고... ' 돈키호테처럼.

.게시판에 올라온 '스콧 핸슨 (뭐하는 사람인지)'이라는 사람의 말이 오늘의 요점이다. "당신의 마음과 머리를 위해 뮤지컬 돈키호테를 꼭 볼 것을 강력하게 권한다 "
나는 아무 기대도 없이 돈키호테를 보았으나 마음과 머리에도 좋았고 간장게장도 얻었다. 언니가 조카들을 인솔해주어 고맙다며 직접 담가서 애지중지 아껴먹던 국산 간장게장 큰 게 세 마리를 하사하셨다.


.
뮤지컬 돈키호테 (Man of La Mancha)
김성기.류정한.강효성.이혜경 주연
8월 2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연출은 '지킬 앤 하이드'를 연출했던 데이빗 스완.



in Culture
Posted by nuncoo at August 6, 2005 01:2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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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그렇지않아도 오늘 얘기 한다는 걸 잊고 왔네.
뮤지컬 보고 감동하기는 난생 처음.
(본 게 몇 편 안되니까 당연한지도 모르지)
류정한이 나온 걸 봤어.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좋더군.

Posted by: nuncooo at August 11, 2005 01:26 AM

이 뮤지컬 괜찮았나 보네요. ^^
류정한과 김성기 두 사람 중 누구 것으로 보셨는지
궁금궁금...

Posted by: 쫑은 at August 11, 2005 12:59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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