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k Moon: 목소리
 








Syndicate this site (XML)

September 27, 2005

목소리

책이나 간단한 옷가지는 인터넷으로 사는 일이 많다 보니 모르는 번호가 핸드폰에 찍히는 일이 잦다. 택배회사 직원들이다. 그들이 전화해서 하는 말이래봐야 대개 매뉴얼대로라 상투적인 문답만 몇 번 오갈 뿐
길게 얘기할 일은 없었다.  젊은 배달기사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자신의 용무로 돌아간다. 수백 번 되풀이해서 전화를 받는다해도 인상적인 기억 하나 남기지 못할 흔한 일이다.


오늘도 전화가 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른 클렌징 오일 배달이다. 허나 목소리는 느리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하루 할당량을 절대 채우기 힘들 목소리다. 내 둔한 감각으로 가늠해봐도 그는 이미 나이 50을 훌쩍 넘었다. 오전부터 여러 군데 허탕을 쳤거나 중간에 오토바이가 고장났거나 물건이 잘못 왔다고 영문도 모른채 싫은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피로한 목소리는 아파트 위치도 꼼꼼하게 묻는다. 이전의 택배회사 직원들은 위치를 묻는 법도 없었다. 일에 이력이 붙은 젊은 기사들이었다면 두세 마디 대화로 끝났을 통화가 길게, 고단한 자와  자발적으로 그 고단함을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은 자의 대화모드로 길게 이어진다.
물건 맡길 곳을 알려주고도 할 말이 남은 사람처럼 저 편의 전화가 끊긴 다음에야, 그제서야 나는 전화를 끊는다. 나이 들고 피곤한, 그러나 성낼 줄 모르고 자신의 운명을 오래 참아온 이의 곤한 목소리가 오래도록 마음을 누른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도착한 물건에는 사소한 흠이 보인다. 전 같았으면 득달같이 전화해서 난리를 치고 반품을 했을 법도 한데 오늘은 체념이 쉽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밤마다 자신을 반쯤 죽였다 살렸다 하는 나에게,
이 위험한 나의 바운더리 안에... 곤하게
운명을 밀고나가는 늙은 배달원의  목소리 하나쯤 잔상으로 남아있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겠다.



in Diary 2005
Posted by nuncoo at September 27, 2005 11:53 PM


TrackBack
TrackBack URL for this entry:


Comments

쫑- 말 그대로 추운데 칼바람을 가르고 달려온 퀵 아저씨였구나. 그 모습 참 맘 아프네. 누구나 그렇겠지만 먹고살기 힘들다.

퐁네프- 과연... 나도 딱히 결말을 예측하지 못하겠구나.

Posted by: nuncooo at October 1, 2005 03:30 PM

이 글만 봐도 내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데..
과연.......TT

Posted by: 퐁네프의 연인들 at October 1, 2005 12:40 AM

저는 대체로 택배*퀵 아저씨들에 약해요.
아주 오래전, 늠후늠후 추운 날,
눈썹이랑 코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아저씨를 본 후,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추운데 달려온 아저씨들
다른 일로 고생시키지 않으리라 다짐했었죠.
그래서 반품요청도 안 해요. ㅋㅋ

Posted by: at September 30, 2005 12:28 AM

더 느릿느릿, 우직해지면 바본줄 알아요. 약삭빠르게 삽시다. :)

Posted by: nuncooo at September 29, 2005 02:26 AM

저도 느릿느릿...
우직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착하게 봐줄까요?
크~~

Posted by: 푸른땅 at September 28, 2005 10:36 PM
Post a comment



이름 혹은 닉네임과
이메일 주소는 필수입니다.







Remember personal info?
( 'Yes'를 클릭해두시면 올 때마다 이름과 URL을
입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



이 숫자는 스팸코멘트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니
번거롭더라도 빈 칸에 그대로 옮겨적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