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k Moon: 개갈 안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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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08, 2007

개갈 안 나다

사람은 때로 그가 자주 사용하던 말과 어투로 기억되기도 할 게다.
'한갓지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번거로운 일을 다 마치고 이제야 그 한갓진 시간을 즐기려는 듯 손바닥을 탁탁 털고 일어서던 엄마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릴 적엔 그 말이 우리 엄마만 쓰는 말인 줄 알았다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써서 놀라기도 했는데, 그래도 나에게 '한갓지다'라는 말은 딱 엄마의 말이었다. 우리 엄마의 입에서 나와야 그 의미와 뉘앙스가 가장 정확해지는.



엄마에게 '한갓지다'와 같은 말이 아버지에게는 '개갈 안 난다'는 말이었다.
이마저도 김소진의 '첫눈'이라는 단편을 펼쳐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영 아버지의 말을 잊어버리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봉학이 징역살이를 하고 감옥에서 나오던 날 동네사람들이 누군가 나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설왕설래하는 와중에 반장이 이런 말을 읊는다.
" 젠장, 내가 언젯적부텀 그만두겠다는 반장직인가그래? 거마비랍시고 한 달에 곽서기가 자기 쌈지 풀어나 주듯 발발 떨면서 내주는 썩은 밀가루 두 포가 고작인데, 그것도 닭벼슬 같은 감투랍시고 쓰고 앉았자니 증말 개갈 안 나서....."

 
이 구절을 보는 순간 내 눈은 몇 번이고 같은 문장 위에서만 맴돌았다. 개갈 안 나서. 개갈 안 나서. 그래, 현실의 내게도 이런 말을 쓰던 사람이 있었다. 아니, 내 생애를 통틀어 이 말을 썼던 사람은 우리 아버지가 유일했다. 엄마가 일하는 모양이 맘에 안 들거나 성에 차지 않는다 싶으면 아버지는 " 사람 참, 일을 개갈 안 나게 허네." 하면서 엄마가 하던 일을 낚아채곤 하셨다. 그때의 '개갈 안나다'라는 말이 버젓이 내 눈앞에 활자화되어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과 나무라는 어투가 지금 내 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나와있지 않은 이 말의 뜻을 네이버 지식인은 '일의 끊고 맺음이 정확치 못하고 엉성하고 흐리멍텅하다'라는 뜻이라고 알려준다.
김소진의 '첫눈'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난 영영 아버지의 어휘를 잊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탓하시던 대로 야무지지 못하고 개갈 안나는 성격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게 이런 방식으로 또 한 번 기억된다. 종종 쓰시던, 그러나 다른 이의 입에서는 좀체 듣기 힘든 말로 기억되는 아버지. 아버지를 어휘로 기억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in Diary 2006
Posted by nuncoo at January 8, 2007 02:37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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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언니가 쓰는 가족에 대한 글은, 어찌나 신경숙 소설느낌이 나는지 몰라. 나만 그런건가?
언니의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이상하게..
나에게도 짠한 기억으로 남네.
언니글을 보니,
우리 아빠도 생각나고..ㅠ

난 잘 쓰셨던 말보다는..
라디오 틀어놓으시고, 야구중계 듣던 뒷모습이
떠오르더라구. 쩝
괜히 여기 왔다가 울컥해서 가네.

Posted by: honeymom at January 9, 2007 11:4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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