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비현실적인 몽상에 빠져서 좀체 벗어나기가 힘들 때가 있다. 가령 일을 하겠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우연히 걸어둔 트랙 하나에 정신이 팔려서 하려던 일은 제쳐두고 노래 듣기에만 열을 올릴 때, 나는 듣는 것만이 전부인 직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정신 차리고 일하자..했던 좀전의 결심은 온데간데 없고 이루지 못할 몽상에 정신만 피곤해져서 세상에서 가장 불우한 인간의 모습으로 축 쳐지고 만다. 잠깐 빠졌던 몽상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바깥에 나가 경적소리에라도 시달리며 잠시 잊고있었던 현실감각을 깨워야했을까? 오늘도 집 안에만 머물며 여러 개의 창을 넘나들며 하루 종일 몽롱했다. 새창을 열듯 간단하고 손쉬운 일은 어디에도 없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하루.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맨 처음 이야기인 '가짜 르나르의 야구 박물지'에 나오는 노인은 책을 읽고, 거기에서 야구에 관한 문장만을 옮겨적는 게 일이다. 8대째 이름이 ' 365일의 반찬 백과'인 수고양이와 대략 2만권의 책이 들어찬 방에서 책을 꺼내 읽고 야구에 관한 글만을 모으고 있다. 오전에 한 권, 오후에 한 권. 그것이 평균속도.
그는 프란츠 카프카도 야구선수였을 거라고 믿는다. 야구에 관한 정열이 대단한 걸로 보아 포수후보선수 정도는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의 문장은 벌써 몇 번이나 옮겨적었다.

공이 너무 잘 보여서 치지를 못하는 4번타자도 있다. 처음 입단했을 때는 구슬치기 구슬처럼 작게 보이던 공이 이윽고 골프공으로, 탁구공으로, 사과로, 배구공으로,수박으로 성장해갔다. 그것과 함께 속도는 점점 떨어져갔다. 로케트에서 제트기로, 프로펠러기로, 문명의 진보의 계단을 거슬러 내려가 마지막에는 피서지를 달리고 있는 자전거의 속도가 되고 마침내는 그 자전거에서도 내려 발을 걷는 정도가 되고, 공은 에드벨룬처럼 커졌는데도 그는 공을 치질 못하겠다. 사람들은 슬럼프라고 한다.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 투수는 정직해서요, 던지는 공에 그 사람의 속이 다 들여다보여요. 타자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건 없어요. 그리고 생각합니다. 이 공을 쳐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선생님 나는 슬럼프 따위가 아니에요. 쳐야만 하는 공이 없을 뿐이에요. 그렇지만 왜 일까/? 왜 쳐야 할 공이 없어진 것일까? ...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쨌든 완전히 야구 안에 들어가 버린 기분이 들어요. 어디가 슬럼프입니까?" 

책을 다 보고 나서도 두 사람의 이야기만 간략하게 적을 수 밖에 없는 건, 소설이 원체 ... 우리가 흔히 아는 소설작법과는 다른 식으로 펼쳐져서 당최 줄거리라는 걸 어떻게 요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떤 여자- 한자는 못읽고 히라가나만 읽는 어떤 여자-처럼 야구와 한신타이거즈의 1985년 우승을 알지 못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 이래가지고는 몇 권을 읽어도 긍지를 가지고 읽었다고 말할 수가 없잖아.

그렇지만 하나 하나가 단편 같은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야구처럼 하나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야구가 사라진 세계의 야구처럼 허무맹랑하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손에 잡힐듯하면서도 야구가 정신에 들어오질 않아서 아무 페이지고 펼쳐서 다시 읽어보고 싶은 이야기.  가령, '사랑의 스타디움'에는 야구가 사라진 시대의 향수를 왠지 알 것만 같은 이런 문장도 나온다.
' 맑은 날. 야구를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정도로 맑은 날. 시합개시를 기다리고 있는 스타디움. 스탠드에 관객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필드에서는 나른한 듯이 캐치볼을 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어느 스타디움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 이제부터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시합이 시작될 것이다. 아마 그건 야구겠지. 이 '아마'라는 부사는 통상 생략되는 단어. 그러나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마'라고 쓰고 싶다. 아마 관객들은 시합을 즐길 것이다. 아마 선수들은 던지고 그리고 그라운드를 달릴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르지만'

'봇불 터지듯이 내게 야구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 주의해. 귀를 기울여. 이 세상에 야구와 관계가 없는 건 하나도 없어."
나는 귀를 기울이고 눈을 크게 떴다. 아아 얼마나 나는 무지했던가. 이 세계는 이렇게나 야구로 가득 차 있었는데.'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개정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은이), 박혜성 (옮긴이) ,웅진닷컴

차례...
가짜 르나르의 야구 박물지
라이프니츠를 흉내 내어
센티멘털 베이스볼 저니
일본 야구 창세 기담(綺譚)
코 푸는 종이로부터의 생환
사랑의 스타디움
일본 야구의 행방

Posted by nuncoo at 10:27 PM | in 책읽기 | Comments (0) | TrackBack (0)

재규어씨

엽기스러운 성깔을 싹 거둬낸 순진무구 스타일의 재규어씨.
머리에 전화기를 이고 있지만 짤림.

Posted by nuncoo at 11:53 PM | in 책읽기 | Comments (4) | TrackBack (0)

허니와 클로버

그곳에는 그들이 있다.  지방의 이름난 기관에서도 작품의뢰가 들어올 정도로 뛰어난 어린 예술천재.. 하지만 새로운 걸 습득하고 단계를 뛰어넘을 때마다 지혜열에 시달리는 하구미.
기다리지 않아도 돌아오겠노라며 미망인이 된 리카 주위를 떠도는 마야마. 그런 마야마를 혼자 좋아하는...노미야였나? 암튼 극중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이렇게 이쁘게 태어났는데 수많은 기사들에 의해 수호결계가 쳐져서는 정작 누구 한사람 들어가지 못하는 바람에 여태까지 방치된' 도예 전공 야마다.
돈버는 재주만은 남다른... 8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는 모리다.
'지도가 없는 게 아니라 목적이 없기 때문이야...' 스스로를 진단해내고도 취업도 사랑도 맘처럼 풀리지않는 소심남 다케모토. 
그곳에는 그들이 있다.  넓이 3평 플러스. 부엌 1.5평. 욕실 없음.학교에서 도보로 10분.집세 3만 6천엔.상쾌한 (칼)바람이 휘몰아치는.목조 모르타르. 지은지..26년.... 
'올해 크리스마스 파티가 모두가 함께 보내는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왠지 그럴 것 같아'라고 다케모토는 혼자 생각하지만 ...  아직은 거기 그들이 있다.

딱히 누가 주인공이랄 건 없고, 다케모토의 작품을 본 뒤 거품을 물고 쓰러지던 교수님들의 말처럼 '청춘'이 주인공이라고나 할까? 유치할 것 같았는데 자주 마음이 짠하고, 종종 웃기고 회를 거듭할 수록 마음에 뭔가가 쌓인다.
'청춘'이라는 이름의 대종유 동굴.
그 무렵에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일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커서 뭐가 될까' 생각했던 시절. 다케모토처럼 제일 좋아하는 자전거를 타고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린다면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까?' 
무작정 달릴 줄만 알았던 시절.
다시 돌아간다해도 결국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질 것 같은 시절.  좋은 성장만화 리스트에 허니와 클로버를 맨 앞에 끼워놓고 싶은 마음이다.

올해 5월에 7권이 나왔다고 알라딘이 그러는데, 우리동네 만화가게에는 5권까지 밖에 없어서 조금 더 걸어야 하는...쾌적하고 럭셔리한 인테리어의 새 만화가게의 회원이 되었다.  아래는 그나마 정신차리고 메모해둔 대사 몇 구절.

Posted by nuncoo at 11:58 PM | in 책읽기 | Comments (0) | TrackBack (0)

츠지 히토나리의 편지

'냉정과 열정사이'의 작가 츠지 히토나리가 유명한 소설가가 되기 전, 아르바이트 삼아 대필했던 편지를 바탕으로 쓴 소설.
역자후기를 보니 '대필가'라는 원제가 우리나라에서는 ' 츠지 히토나리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가벼운 에세이 쯤으로 여기고  '잠들기전 한 편' 용도로 책을 펼쳤으나 한 편 한 편 읽으면서는 편지 읽는 재미에 폭 빠져 잠들기전 몇 분을 기다리게 만드는 책이 되었다.
자신을 방치하고 무시한 아내와 자식들이 읽고 가슴을 칠 만한 유서를 써달라는 노인.
손자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도 모르고 병마와 싸우고 있는 할머니를 위해 죽은 손자를 대신하여 편지를 써달라는 어느 부모.  각자 다른 의뢰인들의 사연 속에는 그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살아가는 모습,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이 영화처럼 흐른다.

어린나이에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지만 다시 새로운 사랑에 빠져 친권을 포기한채 새 남자를 선택했던 엄마는 아들의 결혼소식을 듣고 대필가인 주인공을 찾아왔다.
"길에서 아이 손을 잡고 가는 엄마들 모습을 보죠. 그때가 가장 괴로웠다오. 공원에서 아이와 놀고있는 엄마를 보죠, 난 항상 눈을 돌리고 말았어요. 교차로에서 아이와 부모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난 도망치듯 다른 길로 돌아갔어요. 그렇게 모든 걸 버리고 새 남자를 택했는데, 결국 그 사람은 내 곁을 떠나더군요...그렇지만요.. 죽을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게 바로 나라오."

그녀의 편지는 이런 말로 끝맺는다.
" 이처럼 제멋대로인 여자에게서 온 편지를 마지막까지 읽어주어 고맙구나. 두 사람이 행복하길. 코오스케 결혼 축하한다... 네 행복을 마치 내 행복처럼 기뻐하는 무례를 용서해주길."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연애편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연애편지는 올바른 쓰기법이라든지 매뉴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마음 속에 몇 개나 되는 열쇠구멍을 가지고 있어 그 모든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필살의 문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스페어 키 같은 건 있을 수 없다...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는 단 하나의 열쇠가 필요하다. 이것이 연애편지의 철칙이다.'

가장 알싸하게 기억에 남았던 건 가마쿠라 축제날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의 마지막 편지. 그리고 리사의 편지.
리사는 어느날 갑자기 떠나왔다. 3년을 같이 살아온 코오짱 곁을. 아무 말도 없이. 왜 떠나왔는지는 리사 자신도, 그 누구도 모른다.
' 그 이유는 정말이지 나도 모르겠어. 언뜻 정신이 들고보니 바다를 향해 보트를 젓고 있었던 것, 단지 그것 뿐이야.'
'실은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쿠도 씨가 말했어.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흐르는 건 사람이고, 시간은 언제나 이렇게 멈춰 있는 거라고.'
'집을 나온 지 벌써 일년 이상이 지났어. 마음에는 경계라는 게 있어서 사람들은 그곳을 들어갔다 나왔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고 생각해. 난 마음의 국경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고 아직도 여행을 하고 있어. 마음의 경계란 복잡하고 다양한 지형을 그리고 있어. 내가 어느 날, 집에 돌아가지 않고 여행을 떠난 건, 좀 특별한 지형을 한 마음의 풍경에 발을 디뎠기 때문이야. '

코오짱과 살던 동네로 돌아온 후에도 리사는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에 방을 구하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코오짱이 혼자 밥을 먹는 모습, 혼자 산책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본다.
' 바로 내 앞을 코오짱이 지나간 적도 있어. 하마터면 들킬 뻔했지. 코오짱 앞으로 나서고 싶은 마음을 죽을 힘을 다해 눌렀어. 코오짱은 표정 없는 얼굴로 바로 내 앞을 지나갔어. 코오짱, 난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널 보냈어. '
'어느 날, 코오짱이 회사에 간 다음, 나는 오랜만에 집 안으로 들어가봤어.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었지. 집 안은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었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날 아침으로 돌아간 것처럼.
집을 나오다 얼핏 식탁이 눈에 들어왔어. 찻주전자 옆에 종이가 놓여 있었어.<리사, 어서 와>라고 적혀 있었어.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어. 코오짱이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 놀라 주변을 둘러보고 말았어.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종이는 이미 노랗게 색이 바래 시간이 지났음을 말하고 있었어.
리사, 어서 와 '

여기까지 적고 나니 조금 전에 본, 이번 육군GP 총기난사 사건으로 숨진 군인들의 미니홈피에 적힌 글들이 더욱 마음에 걸린다.
'편지 많이 써줘요. 나 면회, 전화 안되잖아요.' 사망한 한 군인의 미니홈피 대문에 걸린 글.
'답장 써놓고 보내지 못했는데.. 어디로 보내야하니...' 역시 사망한 어느 군인의 일촌평에 적힌 글.

Posted by nuncoo at 01:46 AM | in 책읽기 | Comments (3) | TrackBack (0)

이상한 나라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어서야 시작하는 이상한 나라. 그 나라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 같던 이야기. 다시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지만 아, 문득 당신이 없고서야 시작할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문득 끝이어서야 시작할 수 있는 이상한 나라.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정말로.

이장욱 시집 ' 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사, 2002)' 중에서

Posted by nuncoo at 12:40 AM | in 책읽기 | Comments (2)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