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생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

- 천양희 '어떤 일생'


요며칠 이 시가 자주 눈에 들어온다. 자주 노출이 되었다기 보다는 내가 이 시에 크게 걸려넘어졌지 싶다. 링크해두었다가 허락없이 옮겨왔다. (출처: Gasoline DrunkenSTAR)

Posted by nuncoo at 12:54 AM | in 책읽기 | Comments (3) | TrackBack (0)

우리는 몰바니아로 간다

우리는 몰바니아로 간다 - 지도에 없는 나라로 떠나는 여행 안내서 - 원제 Molvania (Jetlag Travel Guide)  
산토 실로로 외 다수 (지은이), 전지나 (옮긴이), 오래된미래


론리 플래닛 같은 여행정보서를 비꼬기로 작정하고 쓰인 책 같다.
다른 여행서와 마찬가지로 '몰바니아 고대사 한눈에 보기' '여행시 유용한 표현' '몰바니아 태생의 유명인들' '외기 힘든 복잡한 지명'들이 나오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 어차피 몰바니아는 어디에도 없는 나라니까.  지상에 없는 나라에 대한 몽롱한 판타지를 꿈꾸고 책을 펴든 사람들에게는 일찌감치 맘을 바꿔먹길 강권한다. 론리 플래닛의 기본 와꾸에 비아냥과 말장난 같은 유머만 끼워넣었을 뿐, 저자들은 애당초 당신들의 꿈과 환상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부족한 유머감각을 보충하게 위해 책을 펴든 사람이라면 끝까지 읽어야 한다. 낯선 지명이 거치적거리고, 계속 이어지는 숙소,식당, 볼거리 정보가 지겨워도 끝까지 읽어야 한다. 유머의 생명은 반복, 그리고 긴 지루함 끝에 마지막 한방임을 200여 페이지를 다 읽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10000원이면 비싼 수강료지만 택시 타고 개콘 공개방송에 다녀왔다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실수로 이 책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중간 중간 피식 웃었던 부분에 꼭 밑줄을 그어두어야 한다. 나중에 밑줄 그은 부분만 되풀이해서 읽다 보면 책값을 환불받으러 책방으로 가는 무모한 사태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중반부터는 밑줄을 그어두었다. 밑줄마저 그어놓지 않았다면 독후감? 국물도 없다.


책 뒷날개에 있는 <몰바니아에 대해 자주 묻는 질문들>

어디에 있나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지만 일반 지도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가죠?  많은 사람들이 항공편으로, 대다수는 실수로 몰바니아에 도착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나요? 살충제와 조명탄, 그리고 물론 여행 안내 책자가 필요합니다. 살충제는 벌레를 쫓을 뿐 아니라 몰바니아 음식에 뿌리면 그나마 먹을만 하게 만들어 줍니다. 납치 같은 예기치 못한 경우에 대비해 포로 환송비를 준비해 가는 것도 좋습니다.


밑줄.
알아둡시다.
여행 중에 받은 부가세 영수증은 함부로 버리지 않도록 한다. 부가세 반환 제도의 혜택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쓰레게 무단 투기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몰바니아 서부에서,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할 때 들어가도 되겠냐고 묻는 정중한 표현은 '드루브즈코 블롭 아트리쪼'이다. 다른 사람의 직장을 방문할 때에는 '클로지쯔 블롭 아트라쪼'라고 한다. 두 가지 표현 다 '총 쏘지 마세요'라는 뜻이다.


숙소/저급
디아그좁 호스틸 배낭 여행자들의 천국인 루텐블라흐에는 저렴한 가격의 호스텔과 여인숙이 많다. 여행객들로 붐비는 도미토리 침대가 25스트루블 정도. 샤워나 목욕시설은 없지만 길 건너편에 할인 세차장이 있다.

빌라 포스텐 1983년에 호텔로 개조되어 세계 고급 호텔 연합의 회원이 되었다. 그런 단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질 때까지는 다들 그렇게 알고있었다.

이즈반 호제스키 직원은 좀 무뚝뚝하지만 공손하다. 어떤 여행자는 금연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직원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물조심!
수압이 불규칙하므로 바자나의 고급 호텔에 묵는 여행자들은 비데사용을 자제할 것을 당부한다. 최근 이곳에 묵었던 어느 여행자의 말처럼 '위생관리와 장세척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하이라이트
도심지 부근의 바르디조프 박물관은 커다란 건물에 몰바니아의 보물과 유물등 중요한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박물관에 있다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전시장을 한두 시간 정도 둘러본 뒤,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 앞에 줄서서 기다리면서 하루를 보내기 십상이다.

세레조의 안톤 추브스키 공항까지 정기 운항하는 비행기가 있다.안톤 추브스키는 여러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의 이름을 딴 것이다. 추브스키는 1차 세계대전 때 단독으로 비행기 18대를 격추시켰는데, 그중 무려 6대가 적군기였다.


식당
바르지스 바르지스는 밝고 산뜻한 간판으로 유명한 피자 전문점으로 내부는 정반대다. '멸치와 무화과와 소화제' 같은 흥미로운 토핑을 얹어준다. 식당 안에서 먹을 수도 있고, 집에 가져가서 토할 수도 있다. 식당에서 100m 이내라면 어디든 무료 배달 서비스를 해준다.

한때 몰바니아의 식당은 모두 지저분하고, 어둠침침하고, 터무니없이 비싼데다가 그나마 루텐블라흐 중심가에만 몇 군데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요즘은 그런 식당이 전국 곳곳에 있다.

Posted by nuncoo at 10:26 PM | in 책읽기 | Comments (3) | TrackBack (0)

룰

" 생각해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일도 그것을 일단 모르는 일로서 문장의 형태로 만들어 보는 것, 그것이 글을 쓰는 내게 있어서의 최초의 룰이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이정환 옮김,자유문학사 


갑자기 사라진 스미레.
스미레가 남겨놓은 디스크 속 '문서1'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밤마다 무수한 양의 문장을 만들어내며 글을 쓰던 스미레. 그녀는 .. 그녀의 표현대로 하자면 '문장의 형태를 이용해서 사고를 하고 자기자신을 확인하는 습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알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발치에 흩어져있는 단어들을 모아 문장의 형태로 나열한다. 그래도 도움이 되지 않으면 다시 문장을 흐트러뜨리고 다시 배열하고... 그래서 어떤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남들보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힘든 일도 성가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뮤'를 만난 이후 스미레는 문장을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냥 뮤 옆에 붙어있으면 되었고 뮤와 함께 흘러가면 그걸로 족했다. 사고가 멈춘 것이다.  그 와중에 나온 문장이 이랬다.

"내가 알고 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일도 그것을 일단 모르는 일로서 문장의 형태로 만들어 보는 것, 그것이 글을 쓰는 내게 있어서의 최초의 룰이었다"

맥락상 다른 이야기이긴 했지만, 글 '짓기'를 염두에 둔 이들이라면 참고해볼만한 실용적인 작법인듯 하여 여기 메모해둔다.

그렇지만...
'모르는 일로서 문장의 형태를 만들어 보는 것'이라... 이를테면 어떻게 하라는 얘기지?

Posted by nuncoo at 02:25 AM | in 책읽기 | Comments (0) | TrackBack (0)

물렁물렁한 책 2

대홍수. 산속의 노란 터널로 연어들이 헤엄쳐가는 날이 있을 것이다.

-물렁물렁한 책 152


최승호/ 물렁물렁한 책 

Posted by nuncoo at 01:27 AM | in 책읽기 | Comments (0) | TrackBack (0)

물렁물렁한 책

 사막의 모래쥐와 식물들에게 1mm 비는 반죽용 물 같은 것이다.
연중 강루량 1mm로도 모래쥐 새끼들이 태어나고 사막식물들은 번식한다. 만약 내가 사막의 모래쥐로 태어났다면 종교 이전에 1mm 비에 기뻐했을 것이다. 종교로 전쟁이 터지든 말든 나는 사막에서 1mm의 비를 기다렸을 것이며 긴 목마름 속에서도 나의 삶이 가난하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조차 품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삶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추한 삶도 아닌 것- 모래쥐의 삶은 그렇다. 성스러운 삶이 아니지만 속된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 물렁물렁한 책 3.


강가의 조약돌이 우리에게 침묵으로 말해주는 것은 우리 몸이  아무리 닳아도 조약돌 하나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렁물렁한 책 144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펼쳐보는 ... 최승호/ 물렁물렁한 책

Posted by nuncoo at 10:37 AM | in 책읽기 | Comments (0)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