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네가 여길 지켜.

아사쿠사역에서 숙소로 가는.. 고단한 길 끝에 있던 자동판매기.
누가 뭐라 한 건 아니었는데, 저 불빛이 나를 안심시켰다.
음료수를 뽑아마신 적은 없고 불빛만 한참을 들여다 보곤 했다.

캄캄한 서울 시내에서 불 켜진 공중전화박스를 지나칠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Posted by nuncoo at 04:21 AM | in Diary 2004 | Comments (18) | TrackBack (0)

남자가 들려준 이야기

남자는 눈에서 불이 났다고 했다.
그녀가 그렇게 쉽게... 물론 연애중에도 적극적인 건 남자 쪽이었지만 전화로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그렇게 떠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여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고민해왔노라고,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남자의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미칠 지경이었던 남자는 종일 남자는 술을 마셨다고 했다. 그리곤 고속버스에 올랐다. 방학이라 고향으로 내려간 그녀가 있는 곳 마산집으로 찾아가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며,어깃장이라도 부려볼 참이었다. 아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는 금방이라도 고꾸라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고 했다.

사랑에 빠진 것도 그가 먼저였다. 몇 달간 애만 태우다가 사귀자는 고백을 했고 그 후로도 또 몇 달간 공을 들인 끝에 남자는 여자의 공식적인 애인이 되었다. 대개의 연인들이 그렇듯 다투기도 하고 헤어질 위기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끝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버스 안의 남자는 취기에 감정이 고조되어 그동안 자신이 잘못했던 일들을 혼자 꺼내놓고 찔끔찔끔 눈물까지 흘린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남자가 된 것 같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기 위한 건데 무슨 일이든 못하리.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렸던 베르테르니 로미오 같은 인물들을 떠올리며 남자는 눈물을 닦고 비장한 눈빛으로 창밖의 어둠을 본다.
요의가 느껴진 건 바로 그때였다. 남자는 술을 마시는 동안 자신이 한번도 화장실에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맥주에 소주를 섞어먹고 안주로 홍합탕까지 먹었으니 방광은 부풀대로 부풀어 용량초과를 넘어서고도 남았을 것이다.
남자는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자세를 여러번 고쳐 앉는다. 시계를 보니 마산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두 세시간은 더 가야한다. 휴게소는 이미 지나쳤는데 그때는 마침 여자 집에 도착해서 건넬 말을 고르느라 휴게소에 서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남자는 서서히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여자생각이고 뭐고 온 신경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아랫배에만 쏠린다.
어찌나 힘을 주고 안절부절인지 의자 끝으로 뺀 엉덩이가 슬쩍 허공에 떠서 앉는둥 마는둥이다. 진작에 화장실에 다녀올 걸, 술을 마시지 말 걸.. 순간 상태가 안좋은 길바닥을 지나는지 버스가 잠시 요동하는 사이 참고있던 그것이 찔끔. 급기야 남자는 참고있던 소리를 지르고야 만다.
" 기사님! 잠깐만요... 잠깐만 세워주시면 안될까요?"
" 녜? 이 양반이 무슨 소릴.."
" 진짜 급해서 그러거든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아니, 여기는 고속도.."
" 그게...쌀 것 같다니까요"

남자는 마산에 도착하자마자 여자의 집에는 들르지도 않고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다.
그렇게 절박했던 것이 요의에 시달리면서부터는 아무 생각도 나지않고, 그저 오줌만 눌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밖에는 안들더라고 했다.
트럭들 세워놓는 갓길에 버스를 세워두고 수풀에서 일을 보는 순간,
찬 바람에 얼굴을 내놓는 순간,
술이 깨면서 온몸의 막혔던 것이 왈칵 쏟아지는 순간, 그걸로 한 사랑이 끝났구나 실감이 나더라고 했다.
다 그런 것이다.

Posted by nuncoo at 03:10 AM | in Diary 2004 | Comments (24) | TrackBack (0)

감기

1.
그거다. 그냥 감기를 앓는다고 치자.
위염이나 장염 같은 걸 떠올리자니 벌써부터 속이 쓰린듯하여 안되겠고
편도선염이나 당뇨병 류마티스 관절염 같은 걸 떠올렸으나 겪어본 바가 없으니 실감도 나지 않고 설득력이 떨어져서 안되겠다.
만만한 게 감기 아니던가. 약간의 발열과 기침, 아무 데서나 팽팽 코를 풀어대는 모습이야 아름답지 않겠지만 그런 것쯤은 사람들도 감기환자들에게는 너그러워지지 않던가.
수퍼에서 사온 커다란 대봉감 연시 얇은 껍질을 벗겨내며 오물오물 먹고있자니 호사스런 병수발을 받는 기분이라서 슬쩍 우쭐해지기도 한다.
'맞아, 기침에는 연시가 좋댔어'


2.
'난 그냥 .. 활기를 다 어딘가에 빼앗긴 것 같아'
같이 여행을 다녀온, 지금은 부족함 없이 안락한 주부가 되어있는 아이가.. 언젠가 메신저를 통해 이런 얘기를 건넨 적이 있었다.
'결혼하고 나서 처음에 남편한테 기를 뺏기는 거 같다는 여자애들이 많더라. 남편은 날로 활력 있고 기운차 지는데 자기만 늘상 피곤하고 기운이 없다는 거야. 근데 금방 균형이 잡힌대'
위로를 해준답시고 해준 이야기는 물론... 대충 어림짐작으로 얼기설기 꿰어맞춘 근거도 없는 얘기였는데 그녀는 대뜸,  '임팩트'라는 단어를 띄웠다.
'내가 왜 이런지는 모르겠는데 필요한 게 뭔지는 알겠어. 뭔가 센 거! 강력한 임팩트가 필요해'
그녀가 '강한 임팩트가 필요해'라고 말했을 때의 상태가 지금 나의 것과 비슷했을까?


3.
부쩍 모든 것에 대해 심드렁했고 심드렁하다.
이틀 전에는 이 상태를 통증으로 자각했으니 심드렁한 상태로 결론을 내기까지 이틀이나 걸린 셈인데 사실은 심드렁하다라고 쳐놓고 보니 심드렁한 거지 그게 딱히 맞아떨어지는 진단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다. 징후는 있으되 자신있게 명명하지 못하는 답답함.

할 일은 많은데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런  철딱서니 없는 생각이 수초 간격으로 달려드니 간신히 발동을 걸어놓아도 금방 힘이 빠졌다.
재미없고 일 하기가 싫어서 죽겠다고 푸념이나 늘어놓려고 사무실을 휘 둘러보니 캄캄한 뒤통수가 죄다 막막했다.
누구의 것을 노크해보아야 할지 하나씩 간절하게 쳐다만 보다가 그냥 나와버렸다.
그리고는 줄곧 내 마음의 어지러진 형상과 가장 비슷한 단어를 골라내어 화투장 늘어놓듯 도열해놓고 그것들이 제 의지대로 움직이고 합체되어 보다 설득력 있고,보다 명징한 진단을  내려주길 기다리는 중이다.
현재로선 감기가 가장 유력하다.

그래, 그냥 감기에 걸렸다 치자.

Posted by nuncoo at 02:25 AM | in Diary 2004 | Comments (5) | TrackBack (0)

선물, 나에게 주는

Leaves:  Untitled #9, 1995,  Craig Cutler

이미지출처: www.metergallery.com  (via 잎새에 이는 바람 )

Posted by nuncoo at 04:10 AM | in Diary 2004 | Comments (6) | TrackBack (0)

전화

전화를 걸 때마다 엄마의 끝인사는 정해진 몇 가지가 날씨에 따라, 혹은 계절에 따라 주기적으로 바뀐다.
가장 빈번하게 듣는 말은 끼니 잘 챙겨먹으라는 말.
비가 오면 비 오니까 차 조심하라는 말. 더우면 더우니까 일찍일찍 다니라는 말. 딸은 밥통에 온기가 가신 지가 오래여도,  늦을 게 뻔한 날도 "응응, 알았어" 대답한다.
"응응, 알았어" 말 뿐인 걸 아는 노모도,  몇 년째 똑같은 대답만 되풀이하고 있다는 걸 아는 딸도 늘 그런 식으로 수화기를 놓는다.

일터로 가는 길목의 은행나무에 잎이 아직 소복하게 붙어있는 걸 보고 안도했는데, 엄마는 일찌감치 벌써 겨울채비를 하시나 보다. 레파토리가 바뀌었다.
"날 추우니까 단단히 동여매고 다니고... 숭악헌 일 많으니께... 몸조심허고...일찍일찍 댕기고."
'밥 잘 챙겨먹어'라든지, '일찍 댕겨' 라든지 이렇게 짧은 말로 끝내던 분이 오늘은 끊을 줄을 모르고 계속 얘기를 보탠다.

엄마의 레파토리가 바뀌었다.  진짜 겨울이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칭칭 동여매고 나갔었는데..

물론 요러구 다닌 건 아니구.

Posted by nuncoo at 02:26 AM | in Diary 2004 | Comments (21)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