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의 비행

따위님의 '개미의 행방불명'에 트랙백하여(?) 씁니다.

1.
2004년 9월 2일쯤? 날짜, 시간이 정확하지 않은 그 시각에 넌쿠는 '여자는 역시 피부야. 하지만 화장 지우는 건 귀찮아. '*나, 이번 생은 베렸어. 화장 때문에 베렸어.다음 세상에선 화장하지 않을 거야'
이런 가당치도 않은 생각을 하며 설명서에 써있는대로 크린싱 크림을 은행 한 알만큼 손가락으로 덜어내어 이마를 거쳐 오른쪽 볼에 찍어바르는 순간 푸드득~ 뭔가 날 것을 가진 조류 내지는 곤충 같은 것이 어떻게든 날아보려고 용쓰는 것 같은 소리를 듣는다.
외부인인지 외부 것인지 그 안에 없어야 마땅한 무언가가 침입했다는 위기감을 느낀 넌쿠는 이마와 오른 쪽 볼에 은행알 만한 크린싱 크림을 대롱대롱 달고 혹시라도 그게 떨어질까봐 고개를 뒤로 젖힌채 우스꽝스럽고 부자연스러운 목놀림으로  목욕탕 안을 훑다가 언뜻 바퀴벌레 비슷한 형상을 한 곤충이 바닥에 있는 청소용 스펀지 뒤로 재빨리 몸을 감추는 광경을 목격한다.
곤충 앞에서는 한없이 관대해지는 넌쿠. 흘깃 째려보는 자세를 취하긴 했지만 일단 스펀지가 당장 쓸 물건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바퀴벌레 비슷한 그 곤충이 한번 더 출몰하면 아파트 관리소에 찾아가 소독은 뻔질나게 하면서 왜 바퀴벌레가 내 집에 있느냐고 따지기로 대충의 시나리오를 매듭지은 후 나머지 왼쪽 볼에 은행알 만큼 크린싱크림을 마저 찍어바른다.

2.
2004년 9월 5일쯤? 날짜는 정확하나 시간은 불확실한 그 시각에 넌쿠는 바퀴벌레 비슷한 곤충 따위는 새카맣게 잊고 놀러온 친구의 남의 결혼식 참관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YES24에 주문한 쿠폰zip과 메모리 팩, 책 몇 권은 어느 강을 건넜을까 머릿 속으로 저 혼자 배송지추적을 하는 중이다.
한편 지 얘기를 귓등으로 흘려듣는 것을 눈치 챈 친구는 ' 화장실 좀..'이라고 했는지, '복숭아가 물이 많네'라고 머쓱해했는지는 모르지만 끝이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않은 말을 흘리며 목욕탕으로 간 것 같다. 아니 갔다.. 넌쿠가 아직도 yes24에서 오지 않은 책이며 물건들에 집착하며 내일도 도착하지 않으면 전화를 걸어 따져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넌쿠는 자주 따진다) 친구의 목소리가 목욕탕에서 나왔으므로 목욕탕에 간 게 맞다.
"어! 귀뚜라미다!" 
친구의 목소리에 넌쿠는 yes24며 쿠폰zip,메모리 팩 같은 것이 4월 벚꽃 날리듯 공중으로 하얗게 퍼지며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귀뚜라미와 목욕탕이 어떻게 한 문장에서 씌어질 수 있는 말이란 말이냐.이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몸은 이미 덤들링하듯이 날아가는데 그때까지도 넌쿠는 친구가 귀뚜라미라고 호칭하는 저 문 안의 곤충과 사흘 전에 관대하게! 째려보고 그친 바퀴벌레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친구가 귀뚜라미라고 호칭하는 곤충은... 사흘전 넌쿠가 바퀴벌레라고 생각했던 그 곤충마냥 타일벽에 제 몸을 찧으며 마치 날 것 같은 자세를 취한다. "어? 귀뚜라미가 왜 여기 있지?" " 벌써 귀뚜라미가 있네?"라고 말해야할 타이밍에 넌쿠는 "어?  얘... 귀뚜라미였구나"라고 말하며 반긴다.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날든지, 기어서 내려가든지.. 나머지 생을 결정하는 것은 너의 몫이라며 베란다 창틀 위에 귀뚜라미라고 확정되고 판명되어진 곤충을 올려놓으며 친구는 '너의 집은 목욕탕에서 가을에 오는구나' 말하고 다시 귓등 모드가 된 넌쿠는 '가을은 가을인가 봐' 말하며 베란다 문을
닫.는.다.

( * 황지우의 시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 처음 3연 마음대로 갖다씀.
원문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Posted by nuncoo at 03:07 AM | in Diary 2004 | Comments (14) | TrackBack (0)

Alex Colville- Berlin Bus

                  
Alex Colville- Berlin Bus (1978)
Acrylic on hardboard
53.4 x 53.4 cm
Private collection

'장미'는 없다, 죽은 지 오래다, 라고 펜을 든 남자들이 말했다. 살아 있더라도 뇌사상태야.
그것에게 매달리나니, 늙고 지친 여자에게, 세상이 이렇게 살기 좋은데.
게다가 부담없는 텅빈 세련된 여자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데, 무슨 궁상이람.

중요한 건, 어떻게든, 이 휘황한 껍질의 삶에 편입되는 거야.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어. 세상이 망가진 건 내 탓은 아니니까.
게다가, 뭐 그렇게 나쁘지도 않잖아, 봐, 얼마나 살만한 세상인가.

-<장미>, 보내지지 않는 늙은 여자 /김정란 -일부--
글 출처: 김정란 허공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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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예전 블로그에 문패처럼 걸려있던 그림.
저 그림만 보면 괜히 힘이 나고 신이 났다.
그러고 보니 난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그걸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 저토록 힘차고 간절하게 각축을 벌인 기억이 없다.
하다못해 저 멀리에서.. 내가 탈 버스가
서두르라며.. 호들갑스럽게 불빛을 껌뻑이며 달려와도 뛰어야 할 상황이면
차라리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어깨에 맨 가방에 옆구리를 두들겨 맞으며 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급하게 안달하는 것은 추한 짓이야. 
욕망을 속이며 점잔을 떠는 사이에 속은 새카맣게 타버렸다.
그래서인가. 날아오를듯 경쾌한 그녀의 뜀질이 부럽고 부러워 자꾸 쳐다보았다.

고개 돌린 그녀의 표정이 궁금하긴 하지만 뭐 괜찮다.
그녀의 날렵한 움직임은 저 이층버스를 앞지르고도 남을 기세니까.
그녀가 각축하는 건 이미 떠난 버스 따위가 아닐테니까.

Posted by nuncoo at 02:10 AM | in Diary 2004 | Comments (2) | TrackBack (0)

포상의 밤

수고했다. 수고했다.

집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Posted by nuncoo at 11:55 PM | in Diary 2004 | Comments (7) | TrackBack (0)

근황

번잡하되 내 생에는 가장 무성의했던 날들로 기억될 것이다.
피곤하다.

Posted by nuncoo at 03:27 AM | in Diary 2004 | Comments (27) | TrackBack (0)

!

" DNA 검사 결과 이것은 넌쿠의 콧물이 틀림 없소! 같이 갑시다."
내일 아침에 경찰이 잡으러 올 거라고 친구가 협박을 했어도 그렇지.
지금 이 시각.
여의도 HP빌딩 앞에 슬그머니 버리고 온 코 푼 휴지 생각만 10분째 하고 있는 나는 뭐냐.
게다가 좀 전엔 '아무리 찾아봐도 휴지통이 없더라고.' 라고 찍을 뻔.

Posted by nuncoo at 03:01 AM | in Diary 2004 | Comments (3)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