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어딜 좀 다녀오느라 잠시 집을 비웠더니 너무 황폐해진듯 하여
더 황폐한 풍경의 사진으로 틈을 채워본다. 땜빵이지만 아주 아주 근사한 사진들.

Mark Tucker- Breakfast area, Days Inn lobby. Banning, California.

Mark Tucker- Early morning, Yucca Valley, California.


Mark Tucker의 더 많은 사진은 이곳에-

Posted by nuncoo at 02:46 AM | in Diary 2005 | Comments (5) | TrackBack (0)

거창하지만 결단

연애하던 시절 딸기군은 나라는 사람을 두고  '어느 단계에 다다르면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음을...그 증거를 확인해야만 안심하는 사람'이라고 분석해준 적이 있다. 나는 분석당하기를 좋아하므로 그게 좋은 소린지, 안좋은 소린지 분간도 없이 .. 그게 바로 나! 라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오늘, 계획했던 일 하나가 수포로 돌아갔다.
불안하고 맥이 빠져야할 상황이지만 내가 앞으로 취해야할 태도와 노선이 보다 명확해졌기에  도리어 마음이 평온하다.
모호한 희망에 몇 개월을 마음 졸이느니 명확한 불행에서 손 탁탁 털고 다시 출발하는 편이 낫겠다.

(아, 대한민국에서 철없는 20대의 마인드로 30대를 살려니 참 힘들어.. :)

Posted by nuncoo at 02:43 AM | in Diary 2005 | Comments (4) | TrackBack (0)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 진정한 사랑이 뭔지 내가 말해보지. 좋은 예를 하나 들게. 그런 다음 각자 결론을 내려봐."
멜은 이렇게 말하며 자기 잔에 진을 좀더 따랐다.
" 우리가 사랑에 대해 정말 알고있는 게 뭘까? 사랑에서 우리는 초보자일 뿐인 것 같아.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서로 사랑하기도 하지. 그 점은 의심치 않아. 그런데 가끔 내가 전처 역시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게 되면 헷갈리기도 해. ... 전처를 생명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어. 하지만 지금 나는 그녀를 혐오해. 그래, 이건 어떻게 설명하지? 그 사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사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난 알고싶어. 누군가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어...
만약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요- 바로 내일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상대. 그러니까 다른 한쪽은 한동안 슬퍼하다가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곧 다른 누군가를 만나 다시 사랑을 하게 될 거라는 거야. 그러면 이 모든 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모든 사랑이 그냥 추억이 되겠지. 내 말이 틀렸나? 근거가 없나? 난 알고싶어. 내 말은, 난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거야."

-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What We Talk When We Talk About Love) 중에서. 말줄임표는 내 맘대로 생략한 부분.
레이몬드 카버 (지은이), 정영문 (옮긴이), 문학동네

엊그제 마침 여유가 생겨서 엄마와 하룻밤 자고 올 요량으로 어버이날 이후 약 3주만에 서해대교를 건넜다.
초저녁에는 다행히 고마운 분도 놀러오셔서 적막했던 집안에 모처럼 사람 목소리가 흘러넘쳤다.
아버지가 떠나신 이후... 우리집에 들르는 사람들은 모두, 엄마에게는 고마운 분으로 통했다. 저녁에 전화를 하면 엄마는 그랬다. " 고맙게도 ... 시내네 아줌마가 와서 같이 있다. 혼자 있다고 말동무 해준다고 와주니 얼마나 고맙냐."
나도 먼 곳에서나마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마음으로 그랬다." 그러게, 정말 고마운 분이네"

고마운 분이 가고나면 늘 혼자였을 엄마는 내가 있어서 안심했는지 아홉시 뉴스가 끝나자 잠이 들었다.
텔레비전 정규프로그램이 다 끝나자 아버지가 늘 기대고 앉으시던 장롱에 등을 대고 앉은 딸은 레이먼드 커버를 읽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집에만 내려가면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집에 갈 때면 늘 책 한 권씩을 챙기는데, 이번에는 가볍게 보자고 골라온 것이 ...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레이먼드 커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이었다.
이렇게 침울한 밤에 아슬아슬 금이 가고 파멸에 이른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책을 잘못 골라왔군.. 싶지만 새벽이 되기까지는 한참이 남았고, 다른 방법이 없다.
이 불행했던 작가는 소설 속에서도 균열되고 서로 할퀴고 상처입은 파멸의 순간만을 포착한다.
'이전에는 조금 행복했을지 몰라도 지금의 너희들은 아니야. 이렇게 불행하고 이렇게 일그러졌고...이미 다 깨졌어.'라고 말하는듯... 그의 어투는 단호하고 읽는 이는 외로워진다.
덩달아 외로워진 나는 책갈피 너머 엄마를 본다.
70여년을 살면서 역시나 많은 파멸과 고독의 순간을 경험했을 엄마는 상처입은 어린 동물처럼 아프게 누워 가까스로 잠들어있다.

" 이 일이 있은 건 몇달 전이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나이 든 부부가 있었어. 어떤 애가 차로 그들의 차를 받았고, 그들은 온몸이 엉망으로 찢어졌지. 누구도 그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중에서도 여자 쪽이 더 좋지 않았지. 온몸이 말이 아닌데다가 비장까지 파열되었으니까. 양쪽 무릎 연골도 파열되었지... 나는 그들 두 사람을 매일 같이 보러 갔어. 때로 다른 연락이 오면 하루에 두 번씩 들르기도 했지. 둘 다 모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깁스와 붕대를 하고 있었어. 영화에서 그런 장면 봤을 거야. 그들은 정말 영화처럼 하고 있었어. 작은 눈 구멍과 콧구멍, 입구멍만 있었지. 거기에다 그녀는 다리까지 매달고 있었어. 남편은 오랫동안 아주 절망적이었어. 아내가 나아지리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자포자기 상태였어. 하지만 그 사고 때문만은 아니었어. 내 말은 그 사고가 하나의 원인이긴 했지만 모든 원인은 아니었다는 거야. 나는 그의 입 구멍에 귀를 대곤 했어. 그는 사고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눈 구멍을 통해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했어. 그게 자기를 상심하게 한다고 했지.
상상할 수 있어? 그는 머리를 돌려 자기 마누라를 볼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던 거야.
내 말은, 그 늙은이가 망할놈의 마누라를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는 거야...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알겠어?"

Posted by nuncoo at 01:42 AM | in 책읽기 | Comments (4) | TrackBack (0)

그중에 으뜸은 장미

0530
Originally uploaded by nuncoo.

2. 극장전 (劇場前, 2005)
나는 이제 홍상수에 길들여진 건가. 그의 영화에 나오는 치졸하고 쪼잔하며 유치하거나 위선적인 캐릭터가 더이상 새롭지도  뜨끔하지도 않으며 불편하지도 않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오,수정' 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불편했던가.
너덜너덜한 속을 다 들켜버린 것처럼 불편하여 머리가 아프고, 홍상수 저 사람 참 잔인하고 냉정한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시트콤 한 편을 본 것처럼 ... 극장을 나선 후에도 이렇듯 기분이 말끔할 수 있다니. 분명 그것도 비아냥일텐데 속이 배배 꼬이기는 커녕 유쾌하다. 

" 너랑 선배랑 똑같아. 쿨한척 하는 거나.."
" 사석에서 한 얘기를 영화에 써먹냐 . 그거.. 다 내 얘기거든."
" 목도리는 줘라. 우리 엄마가 선물해준 거거든 "
" 아냐, 원래 가끔 폈어. 말보로 레드"

나도 주차장으로 내려오면서 자판기를 보며 영실을 생각하긴 했다.
" 저기에 200원을 넣어두면 다음에 오는 사람이 행복해하겠지? "
" 저건 어디서나 보이네" 
이 대사도 한 번 날려주고 싶었지만, 영등포에서는 남산타워가 보이지 않는다.




3. 장미전( 薔薇前 ) 
롯데시네마가 좋고 극장전이 좋아도 그래도 그 중에 으뜸은 장미라고 제목에 썼다.
영화도 보고, 세탁소도 들른 후에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오랜만에 들고 나온 200만 화소짜리 파워샷 S100으로 장미꽃을 찍어대며 놀고보니 오늘 하루 내 눈 앞에 스쳐간 영상, 그 중에 으뜸은 장미요. 모든 것은 장미전(薔薇前)이다.
만세하기 전의 만세전(萬歲前)에서 극장전(劇場前)이라는 제목이 나왔다고 하니 장미전이라고 안될 것도 없겠다.
바닥까지 늘어진 장미덩굴을 액자 삼아 들여다보니 그럭저럭 살만 하고 참신한 오후구나.
장미가 피었네. 그새.
5월의 끝, 장미전.

Posted by nuncoo at 12:57 AM | in Culture | Comments (6) | TrackBack (0)

모기를 잡는 이상한 방법

컴퓨터 앞에서 뭐 좀 하려고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겁도 없는 모기 한마리가 모니터 위에 앉는다.
너를 클릭하면 뭐가 열리니? 딸깍.
내가 찾는 건 오직 싱싱한 피가 흐르는 혈관뿐인데. 모니터엔 혈관도, 빨아들일 그 무엇도 없구나. 포로롱.

안이한 마우질을 멈추고 날아간 모기 따위는 잊고 있을 무렵 아까 그 녀석임이 분명한 모기가 책상 위에 앉는다.
그때 난 뭐하려고 물티슈 한 장을 뽑아들고 있었을까?
들고 있던 물티슈의 용도를 생각할 틈도 없이 그것을 냅다 모기를 향해 던져버린다.
아, 이건 마치 춘향이 에미 월매가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을 대접하기 위해 그물을 던져 닭을 잡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설사 그런 장면이 없다손 치더라도 월매의 닭 잡는 폼은 내가 모기잡던 폼새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우겨본다.
물티슈를 가만히 들어올려 보니 피 한방울 빨아보지 못한 모기 한마리가 혈흔도 없이 등이 꺾인채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

어제 낮에는 작년 여름에 신던 샌들을 신발장... 손이 잘 닿는 곳에 옮겨놓았다. 
밤에는 이유 없이 어지럽고 구토가 몰려와 헛구역질만 하다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잠들었다.
오늘 낮이 무척 후텁지근했던 걸로 보아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번씩 치르는 기력없음증이 아니었나 싶다.
아, 이제는 진짜 여름인가 .

Posted by nuncoo at 12:13 AM | in Diary 2005 | Comments (9)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