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간단한 정리

이 남자의 취향 - 양복 쓰리버튼을 싫어한다. 반드시 투 버튼이어야 한다.
디자인보다는 옷감을 먼저 보고 와이셔츠는 반드시 면 100%여야 한다.
옷 입기에 대해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그 남자들의 취향...,이라기보다는 추세 - 양복이나 넥타이나 스트라이프가 대세고 와이셔츠는 와이드스프레드 셔츠가 유행이다. 알면 보인다더니, 스포츠뉴스에 인터뷰하는 장면이 잡힌 아인트호벤의 히딩크 감독, 박지성, 이영표선수 모두 맞춰 입기라도 한 듯 셔츠 깃이 넙대대하다.
양복매장에서 파리의 연인 한기주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홍콩익스프레스의 차인표가 패션 아이콘이다.
혼자 머릿 속으로 디자인해갖고 간 넥타이가 매장에 있을 거라고는 절대 기대하지 말라.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다.
남자 혼자 가서 이상한 넥타이를 골라왔다고 탓할 일도 아니다. 넥타이 매장 한 바퀴를 돌고나면 누구라도 정신이 혼미해져서 아무 거나 덥석 집어들고 나오게 될지 모른다.  여자들 옷에 달린 스팽글이나 요란한 샤링보다 남자들 넥타이의 잔무늬와 스트라이프, 광택이 두뇌운동에는 더 치명적이다. 내가 보기엔 그렇다.
더구나 매장 여직원들의 호객행위는 소리만 지르지 않을 뿐, 할인마트의 생선코너 직원들 수준이다. 오늘 못 팔면 넥타이가 맛이 가는 줄 알았다.

백화점 세일 마감을 앞두고 1시간 30여 분 동안 남성복 매장을 휩쓸고 다니며 습득한 정보.  결혼 전에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들.
내 근저에 남자들의 의생활 카테고리가 생성되고있는 듯한 조짐이 보인다.

Posted by nuncoo at 01:20 AM | in Diary 2005 | Comments (6) | TrackBack (0)

재능

재능은 없고 재능없음에 대한 자각만 선명한 이는 얼마나 불행한가.
새삼스럽게 분수를 알고 눕는 밤엔 잠도 쉽게 오지 않는다.

Posted by nuncoo at 11:57 PM | in Diary 2005 | Comments (1) | TrackBack (0)

치과에서

머리를 하러 갈 때는 더 공들여 머리단장을 하고 나간다. 지금 상태가 이러하니 미용실을 나갈 때는 더 괜찮아져서 나가야 한다는.. 미용사샘에 대한 압력이다. 옷을 사러 나갈 때도, 구두를 사러 갈 때도 되도록 뽀대나는 차림을 하려고 신경을 쓰는 편이다.
하지만, 몇 년 만에 치과에 다니면서는 화장도 안 하고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어슬렁거리며 나간다. 치과에서는 입만 벌리면 만인이 평등하다. 명품가방 하나 안 들었다고 해서 명품샵에서처럼 쭈뼛거릴 이유도 없고, 위아래를 훑는 시선에 불편해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치과에 가면 몹시 불편하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나는 이런 사람이요, 이렇게 되는대로 먹고살아 왔소...' 막무가내로 살아온 삶을 속속들이 내보이는 느낌. 그리곤 입을 더 크게 벌리라는 주문에 따라 온 힘을 다해 입을 벌리고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은 잠시 잊으려 애쓴다.
그래도 생각은 멈출 수 없으니 어떡하나.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내 이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걸 느끼며, 간호사와 의사의 시선이 입을 쫙 벌리고 누워있는 나의 얼굴에 집중돼 있는 걸 느끼니 치욕이랄 것까지야 없지만 부끄러움은 어쩔 수가 없다.
이럴 때 감고 있던 눈을 확 떠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좀 놀랄까?
힘 빼라고 몇 번이나 주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려 보면 발끝부터 손끝까지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어떤 땐 잔뜩 긴장해서 한껏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제 입 다무셔도 됩니다." 하는 소리도 놓치고 말았다. 오래 벌리고 있어서 얼얼한 것보다 그러고 있었던 게 부끄러웠다. 아, 치과에서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데 더는 뻔뻔스러워지지 못하겠다.

첫 번째 간 날. 마스크 벗은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는 그 의사는 내가 앞니를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했다.
양치질을 험하게 한 탓에 잇몸이 밀려 올라가고 치아가 많이 드러나 있다. 이건 성격이 급한 탓이다.
점쟁이를 대하듯 나는 하마터면 부끄러움도 잊고 '그것 말고 저의 식생활이나 음식 먹는 습관, 성격 분석도 좀 해주실래요? 하고 물을 뻔했으나 잘 참았다.
전에 다녔던 치과에서는 입만 남겨놓고 얼굴에 가운을 덮어주던데 이번 치과는 그런 것도 없다.
그래서 매번 의자에 누워있을 때마다 잠시 고민한다. 의사는 분명히 눈 감으라는 얘기는 안 하던데, 눈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입 쫙 벌리고 눈까지 동그랗게 뜨고 있으면 그건 좀 웃길까?

Posted by nuncoo at 01:25 AM | in Diary 2005 | Comments (6) | TrackBack (0)

모터사이클다이어리, 아버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꿈에 아버지를 보았다. 방문을 열어보니 돌아오신 아버지가 분주하게 움직이신다.
'왜 다시 오셨냐'고 물었더니 비석도 세워야 하고 할 일이 많다며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채로 여기저기 왔다갔다하신다.
깨어보니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는 이미 포데로사도 잃은 채 칠레를 지나고 사막을 넘어 페루를 향해 가는 중이다.
다시 잠이 들었는데 분주히 움직이던 아버지, 이번에는 아주 선명한 얼굴로 내 앞에 누워계신다. 군데군데 빠진 머리칼, 검은 낯빛.
아버지 얼굴을 내려다보며 서럽게 울었다. "얼마나 보고싶어했는지 알아요?" 아버지, 힘없이 나를 보며 대답하신다 "그랬냐?"
깨어보니 베갯잇은 흠뻑 젖어있고 서러운 눈물은 그치질 않는다.
화면 속의 에르네스토는 맨몸으로 헤엄쳐 밤의 아마존강을 건너는 중이다.

꿈이 희미해질까 봐, 오랜만에 들은 아버지 목소리의 느낌마저 잊게 될까 두려워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멈추고 몇 번이고 꿈결만 더듬었다.
명랑하게 재잘거리다가도 저 혼자 갑자기 울컥하는 내가 아버지 보기에도 안쓰러웠던 게지. 그래서 다녀가신 거겠지. 현실에서 조우한 듯 너무나 생생한 꿈, 아버지의 얼굴, 아버지의 목소리.
전화해서 꿈에 아버지를 뵈었다 말씀드렸더니 엄마는 그러신다.
"살다 보면 그렇게 가끔 다녀가시느니라"

Posted by nuncoo at 02:19 AM | in Diary 2005 | Comments (1) | TrackBack (0)

여의도, 일요일밤 10시

여의도의 일요일 밤 10시.
점심시간만 되면 넥타이를 펄럭거리며 빌딩마다 쏟아져나오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우성도 사라지고 경적소리도 사라진 이곳에서는 내가 이 어둠의 주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바람이 부는 것 같다.
사람이 없어서 일요일 밤이면 골목마다 촬영이 많다고 커피 값을 계산하던 친구는 슬쩍 귀띔을 해준다.
그 거대한 세트장에서 열혈 라이프플래너로 분한 한 여자는 보험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내고 삶에 소심해진 한 여자는 한 줄짜리 유언을 적는다. 만기. 인생 만기.
커피잔이 치워졌다. 다음 씬으로 넘어간다.

Posted by nuncoo at 11:59 PM | in Diary 2005 | Comments (0)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