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지한다, 추억

휴가는 아닌데 며칠 여유가 생겨 집에 다녀왔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다. 병원에 입원하고 얼마후 아버지는 집에 가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하지만 막상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하신 후에는 집에 가지 않겠노라고 하셨다.
홀로 남으실 엄마를 걱정해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엄마는 안방.. 아버지가 늘 앉으시던 자리에 앉을 때마다 니 아버지가 여기서 돌아가셨으면 이 집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있지 못했을 거라고 하셨다.

밤에는 엄마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깨었다. 잠꼬대였지만 어찌나 서럽게 흐느끼시는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리 단단하게 마음을 먹어도 꿈 속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했나 보다. 아침에 물으니 다행히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셨다. 조금씩, 느리게라도 슬픔이 저 밑바닥 깊은 곳에 가라앉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틀밤 내내 세 모녀가 누워 이야기를 나눈 것도 모자라, 서울로 돌아오는 2시간 30여분 동안에도 언니와 난 한시도 쉬지않고 아버지 이야기만 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젊은 날, 습관, 표정을 더듬어보다가 웃고, 떠나가시던 날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같이 눈물을 흘렸다.
주변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이 있다면 망자에 대해 자꾸 물어봐주길 바란다.살아있는 이들에게는 떠난 이에 대한 추억만이 위로다.

1933년에 3대 독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야반도주하여 고학한 뒤에 일가를 이루었다는 한 남자. 엄마 말대로라면 '글월'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어서 평생 이재와는 거리가 멀었던 한 남자.
그 부침 많았던 생애에 관해서는 아직 정리할 여력이 없으나...
어느덧 ...가라앉는다.
먼지처럼 부유하던 많은 슬픔, 그 중에 작은 티끌 하나가 일상으로 고요하게 내려앉는 걸 느낀다.

착지한다. 추억.

Posted by nuncoo at 02:45 AM | in Diary 2005 | Comments (4) | TrackBack (0)

흥얼흥얼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

종일 머릿속으로만 흥얼거린 노래.

Posted by nuncoo at 11:59 PM | in Diary 2005 | Comments (0) | TrackBack (0)

기록2

1.
느즈막히 일어나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다시 잠이 들었다 깨었더니 이내 밤이 되어있었다.
새벽에 눈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일어나 잠깐 흩날리는 눈발을 지켜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것이 까마득한 오래전의 일만 같아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아득하기만 하다.
지난 12월부터 지금까지가 그랬던 듯 싶다.
내가 서 있던 곳은 어떤 경계였을 것이다. 일상은 되풀이되었지만 나는 단지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파닥거렸을 뿐이다.

2.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나는 아옹다옹 즐거웠으나
지금 아버지는 내 곁에 없다. 불과 두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1월 29일에 나는 5년여를 만난 그와 결혼을 했고 2월 1일에 아버지는 힘겹게 잡고 있던 생명의 끈을 놓으셨으며 신혼여행을 떠났던 나는 2월 5일에야 봉분으로 남은 아버지를 만났다.
1주일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3.
신혼여행지에서도 잘 견디고 계시다는 가족들의 말만 믿고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마음껏 포식했다.
전화기로 전해지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걸 눈치챘어야 하는데, 괜찮다고 하는 그 말이 모두 나를 위해 지어진 얘기고 그것이 아버지의 간곡한 당부로 인한 것이었음을 서울땅을 밟고서야 뒤늦게 알았다.
초상을 치루면서도 거짓 안부를 전해야 했던 그 마음들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첫 기착지였던 프라하에서 전화를 바꿔달라고 한 아버지는 '재미있게 놀다 오라'는 말만 서너 번 되풀이하셨다.
팔다리는 이미 굳어가는데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상반신만으로 내는 목소리.
혀를 움직여 발설한 전언이었다기 보다는 딸의 좋은 시절을 지켜주고 싶다는 잠재의식 속에 깔려있던 말이 자동으로 불려져 나온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에서야 뜻하신바, 그 깊은 속을 읽는다.
그리고는 온 식구를 모아 유언을 남기고, 엄마도 꼭 안아주시고, 당신이 입원한 날수까지 헤아리신 뒤 어버이 받들듯 보살펴준 한 간호사에게 고맙다는 말도 전하라 하시고는 조용히 마지막 숨을 몰아쉬셨다 한다.
자정을 넘기면 장례까지 시간이 늘어질 것을 걱정하셨는지 날을 넘기지 않고 자정 3분 전에,
게다가 좋은 명절에 문상 다닐 번거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명절까지 피해서 가셨다고... 남은 사람들은 좋은 말로 서로 위로했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거나 민폐 끼치는 걸 큰 부끄러움으로 여기셨던 아버지의 평소 성격을 보면 마지막 숨을 놓는 순간은 정말로 당신이 미리 예비하고 정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4.
생각해보면 생살을 도려내듯 속이 아린 일이 한두 가진가.
하지만, 그날 결혼식을 마치고 신부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 병원에 도착했을 때 간병인 아줌마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면 몸안의 피가 다 어딘가로 빨려나가는 것만 같다.

" 이젠 아버지 혼자 두고 어디 가시면 안 되겠어. 거동도 잘 못하는 분이 눕지도 않고... 하염없이 병실 문만 쳐다보고 앉아계시더라구. 식 끝나야 올 텐데, 누가 온다구. "

그날 아버지 품에서는 종일 먹지않고 숨겨둔 알약 세 알이 나왔다.
꼭 필요한 약인데 먹지 않았다고 간호사는 아버지를 나무랐다.
나는 그 약을 드시지 않으면 신혼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시위하듯 의자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버지는 약을 드셨다. 알약 세 알도 넘기지 못해 한 알씩 어렵게 나눠 먹었는데 한 번 물을 삼킬 때마다
아버지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Posted by nuncoo at 11:54 PM | in Diary 2005 | Comments (4) | TrackBack (0)

기록1

핸드폰으로 찍어둔 아버지의 사진을 보니 기뻐서 울고 그리워서 눈물이 난다.
320*240 사이즈. 아버지가 작다.

한 달 전이었던가.
마스크를 눈 밑까지 올려 쓴 아버지. 겨울 산 계곡처럼 캄캄해진 눈빛으로 내 어깨 뒤에서 나를 보고 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5년은 더 사셔야죠 했던가.
자꾸 살만큼 살았다 하시니 욕심을 깎아 1년만 더 사시라 했던가.
'아는 언니 시숙어른은 아버지와 똑같은 진단을 받고도 15년을 더 사셨대요. 아버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누군가의 투병기, 기적 같은 기사회생 이야기만이 희망이었던 날들.
그런 이야기를 나눈 날이면 아버지는 골수를 뽑는데 이렇게 잘 참는 분을 못 봤다며 의사가 칭찬했다고 어떻게든 살아내실 분처럼 의기양양하셨다. 항암치료와 수혈을 위해 링거 대신 가슴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집어넣는 수술을 할 때도, 머리를 짧게 밀어낸 후에도 아버지는 힘든 내색 없이 식사량과 배설량까지 손수 챙기며 삶에 의욕을 보이셨다.
그때 아버지는 작지 않았는데, 사진 속의 아버지는 왜 이리 작고 어두운가.

백혈병동으로 불리는 102동 병동은 처음 진단을 받은 환자들과 몇 년째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은 보호자들부터 티가 났다. 오랜 병구완에 단련된 보호자들은 휴게실에 군데군데 모여앉아 귤도 까먹고 떡볶이도 나눠 먹었지만 허둥지둥 복도를 서성대는 사람들은 이제 막 긴 치료를 시작한 초보 보호자들이었고,
자주 구석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그날 아니면 며칠 전, 백혈병 선고를 받은 환자의 가족이었다. 뻔히 처지를 아는 사람들이라 그런 사람에게는 누구도 어설픈 위로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도 몇 주일이 지나면 억척스러운 보호자가 되어 휴게실에서 컵라면도 끓여먹고, 남의 반찬도 덜어 먹으며 보호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갈 테니까.
그 중의 누군가가 치료를 받고 다행히 관해가 되어 퇴원을 한다면...
다시 재발하여 수주일 혹은 수개월 만에 다시 그 병동을 찾는다 해도 자신의 두 발로 건강하게 걸어나갈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병동 안에서는 '누가 퇴원했다더라.' 부러운 얘깃거리였으니까.


언젠가는 병문안을 왔으나 면회금지라 아버지 얼굴도 못보고 가야했던 먼 친척이
"살아생전에 뵐 수 있으려나" 하는 말을 남기고 간 적이 있었다.
먼길을 왔는데 병실 밖에서 쫓아내는 게 미안해서 "나중에 건강해져서 퇴원하시면 그때 뵈요"라고 한 말에 무심코 한 대답이었을 텐데 상처입은 우리 식구들은 그를 다신 보지 말자며 두고두고 원망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전화통을 붙잡고 언니들과 그의 차림새까지 흠을 잡았다.
아마도 그 땐 희망이 아닌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다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었지 싶다.

Posted by nuncoo at 11:58 PM | in Diary 2005 | Comments (2) | TrackBack (0)

Vilhelm Hammershoi

Hvile (Repos), 1905
Huile sur toile / 49.5 * 46.5 cm

Posted by nuncoo at 11:02 PM | in Diary 2005 | Comments (3)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