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빙판길

낮에 흩뿌린 눈으로 길은 이미 빙판길이 되어있었다.
차들이 빠른 속도로 나를 앞질러 갈 때... 길에는 하얗게 눈보라가 인다. 마치 안개 속을 달리는 것만 같다. 엄마와 언니가 쉴새 없이 털어놓는 이야기에 차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렸다. 요즘 우리 가족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죽음' '기사회생'같은 단어들이 귀에 걸려 나는 자꾸 브레이크 밟을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폐렴에 걸린 여자 아이가 입에서 이상한 냄새를 풍기며 쌕쌕거릴 때 엄마는 언니가 죽는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 아이를 들춰업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던 젊은 시절의 엄마와 아버지.
그런데 죽은듯  병상에 누워있던 다섯 살 짜리 여자 아이가 어느 날 새벽에 홀로 깨어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며 앉아있더란다.
"그 어린 것이 글쎄 살아나려고 그랬는지 밖에만 빼꼼하게 내다보고 있는 거라. 그러다 맥없이 누워있다가는 또 밖에만 보고.. 거기에 뭐가 있다고..."
그렇게 다시 살아난 아이는 얼마후 연탄가스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있는 엄마 곁에서 혼자 울다울다 방문을 열어젖혀 엄마를 살렸다고 했다.
"내가 너를 한번 살렸고 니가 나를 한번 살렸다"
모두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다.

외곽순환도로에서 일산 방면으로 가야 하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판교 쪽으로 가고... 나는 내내 갈팡질팡하며 길을 찾지 못한다. 언니와 엄마가 수십년 동안의 가족사를 다 훑고 올라오는 동안에도 언니집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 먼 데 떠났다 오는 사람도 아니고..  처음 오는 길도 아니면서...'
현실로 돌아온 언니가 내가 듣든 말든 상관없이 저 혼자 중얼거리며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이미 어두워진 낯선 동네의 불빛들을 헤아린다. 
죽을 줄로만 알았던 아이. 새벽에 홀로 깨어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던 다섯 살 짜리 여자아이가 언니의 옆모습에 겹쳐진다.

가던 길에서 빠져나와 유턴을 하고 반대방향으로 다시 차를 몬다.
군데군데 불빛에 희번득거리며 드러나는 빙판길. 언니 집으로 가는 길의 방향을 일러주는 이정표. 그래도 여전히 길이 낯설다.
멀리 떠났다가 돌아온듯,
가는 길이 모두 밤길인듯 .

Posted by nuncoo at 01:03 AM | in Diary 2005 | Comments (13) | TrackBack (0)

노파심

부질없을지도 모르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삐지지 말고 삐치세요.

Posted by nuncoo at 01:13 AM | in Diary 2005 | Comments (3) | TrackBack (0)

복수

일요일 오후니 당연히 차도 많고 사람도 많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마트 주차장에 들어가려고 길게 줄을 서 있는 차를 보는 순간.. 짜증은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난 뒤에야 화살표를 따라 전진..정차..전진..
내 앞차는 운 좋게 자리가 생겨서 거기 들어가겠다고 뒤꽁무니를 들이미는데, 움직이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넓은 자리에 차 대는 게 뭐 어렵다고 거기 들이밀 각도와 폭을 가늠하지 못해서 대여섯 번을 들어가는듯 하다가 다시 나오고.. 그렇지않아도 시간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내 앞길을 가로막을 건 뭐냐.
뒤에 선 차들의 경적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괜히 나 혼자 잘못을 뒤집어쓰는 것 같아서 억울해지기도 한 나는 운전자의 얼굴이나 보자는 심산으로 차 안을 살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조수석에서 장난을 치는 아이, 그리고 차를 대고도 뭐가 불안한지 룸미러와 사이드 미러 사이로 눈을 왔다갔다 하며 두리번거리는 아이 엄마.
그때 나, 집요하기도 하지. 아이 엄마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가 두 눈을 부라리고 말았다.
'땅도 넓은데, 주차.. 그것도 못하냐?'  '한심한 아줌마군'
누가 보아도 그건 아주 선명한 경멸의 눈빛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자리를 찾은 뒤에는 '보시오. 아까는 내 잘못이 아니었소. 난 그 아줌마 같은 사람 아니오'하는 태세로 뒷차 보란듯이 주차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난해하고도 복잡 미묘한 상황이 지나자  내가 보인 태도와 행동이 웃기고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는 거다.
카트에 두루마리 휴지를 담으며 '너, 오늘 아주 웃겼어'
새로 나온 녹차 라떼 상자를 들여다보면서도 ' 너 요새 아주 바닥이야'
다른 사람 카트 모서리에 정강이를 찍히면서도 '니가 맛이 갔구나' 
한탄이 끊이질 않는 거다.
부랴부랴 쇼핑을 끝내고 주차장으로 다시 오니, 타이밍도 기가 막히지. 그 아줌마가 마치 기다렸다는듯 자동차 안에 앉아있네?
일방적으로 비웃으며 능멸한 죄도 있고, 스스로 느낀 부끄러움도 있고 하여 나는 아이를 향해 웃는 척도 하며 은근슬쩍 사과의 미소 비슷한 걸 날렸는데, 그 아줌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듯 하더니 아까 내가 던진 것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표정을 보여주시더군.
그 표정 또한 누가 봐도 경멸.
굳이 자막을 붙여본다면 '웃겨~' 아니면 '너.. 아주 쓰레기 같아. 아니?' 이 정도?
물론 나는 반항도 없이 달게 받았다.
다소곳하고 조용조용한 움직임으로 차 문을 따고, 그 아줌마가 라이트를 켜고 날 향해 요란하게 쏘아댈 때도 눈부시다는 제스쳐 하나 없이 온몸으로 골고루 달게 받았다.
그리곤 차 댈 때와는 달리 날렵하게 나가는 아줌마차 뒤꽁무니를 향해 웃어주기까지 했다니까.

아줌마! 멋져.하면서.

Posted by nuncoo at 02:45 AM | in Diary 2005 | Comments (6) | TrackBack (0)

너무한다

꼭 잠들만 하면.. 새벽에.

잠이 확 깨는 바람에 전화해서 버럭 화내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타이밍 못맞추는 건, 나도 할 말 없다만.

Posted by nuncoo at 02:40 AM | in Diary 2005 | Comments (5) | TrackBack (0)

그들만의 리그 2

내내 통증을 호소하며 밥 한 술 뜨지 않던 아버지는 저녁 때가 되어서야 정신이 드는지 며칠 만에 처음으로 바깥의 날씨를 물으셨다.
면회가 허용되는 사람이래봐야 보호자 달랑 한 명.
그나마 그 보호자라는 사람도 외투는 모두 사물함에 보관한채 얼굴에 마스크까지 써야 대면할 수 있는 상황이니
아버지는 내내 바깥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궁금하셨나보다.

" 오늘 춥디?"
" 오늘은 쫌 괜찮았는데, 일주일 내내 추웠잖아요. 
어제 제주도랑 남해안에는 눈도 많이 왔대요 아버지.
지진이랑 해일 난 얘긴 들으셨어요? "
" 얼핏 들었다. 사람 많이 죽었다며..."

밤이면 9시뉴스를 보고 꼭 일기예보까지 챙겨보고 잠드는 패턴으로 사셨던 아버지가 나에게 요즈음의 날씨를 묻는 상황.
어제였다면 모두 절망으로 받아들였을 상황에도 나는 이제 많이 담담해져서 인터넷에서 본 ..사람들이 많이 읽은 기사 같은 걸 억지로 생각해내서 종알종알 읊어댄다.

행여 아버지가 어떤 오해라도 할까싶어 카메라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오늘은 어제 어떤 이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하여 전화번호 찾는 시늉을 하며 몇 장을 찍어두었다.
그러다 끝내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여 찍은 사진을 누워계신 아버지와 나눠보며 한달 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이제는 애타게 그리워 죽을 지경인 일상의 시간을 약 몇 분간 함께 보냈다.

"아버지 2005년이래요.
엄마 뿐만 아니라 언니랑 형부랑 온 식구가 모두 아버지 얘기만 해요.
나도 이제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지 않고, 동생편도 하지 않고.. 내내 아버지한테만 붙어서 같은 편 해드리려구요. 그러니 어서 빨리 일어나  같이 세상으로 나가요."

Posted by nuncoo at 12:29 AM | in Diary 2005 | Comments (2)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