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은

긍정은 지적인 능력이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는다. '긍정은 지적인 능력이다.' 였던가. '지적인 행위이다' 였던가.
어떤 블로그의 대문에 있던 단 한 줄. 다시 찾아보려 헤매다녔으나 계시처럼 딱 한 번 내게 왔다가 다시는 나타나지않는다. 요며칠 나 혼자 계속 곱씹고 곱씹었다. 긍정은 선천적인 기질도, 의지도 아니다. 좋게 생각하라고 무책임하게 내뱉을 말도 아니다.  똑바로 서야겠다고 생각한다. 긍정의 힘으로.
대문에 이 말을 걸어두었던 그 분에게 감사한다. 힘이 되었다.

Posted by nuncoo at 01:12 AM | in Diary 2005 | Comments (2) | TrackBack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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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보니 며칠새 저것들이 다 없어져서 서운했소.

Posted by nuncoo at 11:58 PM | in Diary 2005 | Comments (0) | TrackBack (0)

대낮, 빈 헬스장, 청년

내가 추리를 좋아한다는 걸, 그것도 황당하고 말도 안되는 추리 쪽으로는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아파트 안에 있는 그 헬쓰청년은  아마 상상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우선 밝혀두건데 근래 내 추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헬쓰청년은 베스트극장이나 올드미스다이어리 같은 시트콤에 가끔 등장하는 근사한 골격의 매력남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그는 '가끔'이 아니라 매일 '상주'하는 인물이며 탄탄한 근육을 씰룩거리면서 운동을 한다거나 사자가 갈기를 털듯 땀에 젖은 머리칼을 섹시하게 털어주는 모습은 더더욱 본적도 없으며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카운터에 죽치고 앉아서 카드를 끊어주거나 운동복을 갖다주는 일이 전부다.
생긴 건 가끔 순돌이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 엠씨 몽이나 엠씨 몽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 순돌이 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아니면 주위 사람 중에 가장 따분하고 무료하게 생긴 사람을 떠올리던가.
암튼, 낮이 되면 사람도 없는 텅 빈 헬스장을 혼자 끈질기게 지키고 앉아있는 걸 보면 그는 헬스장 주인의 친척이나 가깝게는 동생이나 자식쯤일 게 분명했다.
늘상 파리 날리는 헬스장. 그것도 오후 2시가 넘어가면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는 텅 빈 헬스장에서 옛날 댄스음악이나 들으며 시간을 죽이는 건 핏줄이 아니고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청춘은 원래 빈 집만 지키고 있기에는 자존심이 센 법이니까.

열흘이 지난 지금은 그는 아마 미스터코리아대회 같은 걸 염두에 두고 있는 연습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운동도 마음껏 할 수 있고 넉넉치는 않으나 생활비 정도는 준다고 해서 관장만 믿고 왔는데 회원카드를 찍어주거나 운동복 나르는 일만 하다보니 지쳐서 저렇게 포인트가 빠진 얼굴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운동을 가르쳐주겠다던 관장은 아침나절에 코빼기만 보였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니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처한 상황이야 어찌되었든 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가장 한산한 시간대에 홀로 러닝머신 위를 뛰고 있는 손님이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을 때 몇 번은 그가 내 뒤에 대고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넨 적도 있었다. 이어폰을 꽂고 있었으므로 나는, 못들은척 돌아보지 않아도 되었다.
카운터 아래에 책 같은 걸 숨겨놓고 몰래 훔쳐보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그 모습이 철딱서니 없고 비굴해 보여서 ... 그럴 땐 핏줄도, 연습생도 아니고 .. 그저 할 일이 없어서 빈 체육관이나 지키며 시간을 죽이는 ..그렇고 그런 한심한 청춘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보고 있다. 등을 돌린채 달리는 데만 열중하는 척했지만 실은 다 보고 있었다.
러닝머신 앞에 있는 텔레비전의 꺼진 브라운관에는
책상 밑에서 몰래 찐 고구마를 벗겨먹고 있는 그...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
내가 그곳에 출입한 열흘 10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은 그의 핸드폰까지 꺼진 텔레비전 브라운관에는 다 비친다.


내가 러닝머신 위에서 달릴 때 케이블 뉴스채널도 켜지않고 빈 화면만 보고 달리는 건, 
그 안에서 아주 느리게, 아주 무료하게 움직이는 어떤 청춘이 있어서다. 


3.5Km를 달리는 동안 그에게도, 나에게도 전력질주가 아닌 시간들이 천천히 흘러갔다.

Posted by nuncoo at 11:55 PM | in Diary 2005 | Comments (6) | TrackBack (0)

묘하다

1.
결혼후 처음 호적등본을 뗀 날.
처음엔 뭐가 잘못 되서 남의 집 것을 준 줄 알았다.
이게 아닌데... nuncoo용 엄마, nuncoo용 동생의 이름은 없고 시아버님이 호주로 되어있는 호적등본에 간신히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나의 이름.
그걸 들고 있는 나는 아직도 손이 달달 떨리는데, 전화기 속의 언니 목소리는 담담한 쪽에 가깝다.
" 몰랐니? 그게 호적을 파간다는 거야. 그게 기분이 그래."


묘하다. 묘한 기분을 굳이 성분분석을 해보자면 아주 씁쓸하고 마뜩치않다.

2.
자고 나면 딸기군의 생일. 백화점에 가서 케익을 사오고 미역을 사고 국거리 고기를 사고, 오후 내내 수선을 피웠다. 엄마한테는 아침에 전화해서 깨워달라고 당부를 해놓고 국에 넣을 고기를 재우느라 주물럭거리고 있는데 마침 딸기군이 들어왔다.

" 뭐해?"
" 어, 내일 아침+미역국...."


" 나, 미역국 안 먹잖아. 생일날 미역국 먹은 적 한 번도 없어"



미역국을 먹지않는 남자... 이건 재앙일까, 축복일까.
이것도 묘하다.

Posted by nuncoo at 11:53 PM | in Diary 2005 | Comments (7) | TrackBack (0)

된장찌개를 끓이며 마돈나를 보는 저녁

'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뮤지컬 배우가 되겠어'
만약 삶을 통째로 바꿀 수 있다면.
생의 저편에 두 번, 세 번째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의 세계가 있다면...두 번째는 서슴없이 뮤지컬 배우라고 하던, 세상의 많고 많은 여자 중의 또 한 명의 여자가 오늘은 다른 꿈을 꾼다.

이건 그냥 노망(老妄)이라고 치자.
10대의 노망은 로망이지만
유통기한을 모르는 서른 넘은 여자가 꾸는 꿈은 늙어서 부리는 망령, 그저 노망이라고 해도 억울할 것은 없다.

한 번의 박수, 한 번의 환호가 보태질 때마다 더욱 광채가 나는 삶.
아침에는 침대에서 잠옷을 입은 채로
새 모이만큼 적은 양의, 그러나 섬세하게 공들인 아침식사를 룸서비스로,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공수받을 수 있는 삶.
사진 한 장 찍으려고 포토라인에서 몸싸움을 서슴지 않던 이가 손해배상을 청구해도,
타블로이드판 무료신문에 볼썽사나운 사진과 악평이 실린다 해도 인상 찌푸릴 일은 아니다. 명성이 높은 이에게는 언제나 그걸 시기하고 흠집 내려는 갈까마귀 같은 인간들이 들끓기 마련이니까.
커다랗고 휘황찬란한 간판에도 기죽지 않고,
무대에서 내 속살이 보이는 걸 창피해하지 않으리라.
끈적끈적하게 춤을 추고 넋을 잃고 바라보는 촌뜨기 청년 앞에서는 더욱 과감해지리라.
'당신처럼 되고싶어요'라고 시골 여학생이 보낸 편지에는 새로 포장을 푼 금장 만년필로 '꿈을 가져요.'라고 적어주리라. 그 다음 편지는 나의 대리인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이 정도라면 수시로 와서 손만 벌리는 알콜중독자에 노름꾼인 가족이나 친척들이 있다고 해도 하나도 고달프지 않겠다.
수많은 남자를 만나 몇 번을 사랑에 빠지고 그만큼 이별을 겪는다 해도 억울하지 않겠다.
원래 화려한 이력을 가진 여자에게는 남자들이 부록처럼 딸리기 마련이니까.
예술을 아는 척 하지만 알고 보면 망나니이거나 마누라 통장에 기생하여 사는 주제에 자존심만 챙기는 못난 남자들. 그래봐야 내가 자서전을 쓴다면 한 줄도 차지하지 못할 인간들이다.
그렇게 여전히 화려하고 강단 있게 늙어가리라.  늙어갈수록 더 아름다워지리라.
내 엉덩이에 손가락질하던 이들도 나를 빼고는 추억을 얘기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은 '그녀는....., 대단했지.' 라고 틀니 낀 늙은 입으로 실토를 하고 말 것이다.

여전히 웃기는 헛소리지만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의 팜므파탈만을 꿈꾸었던 시절도 있었으니 이건 많이 양보한 거다.
그래도 그렇지.
달래된장찌개를 끓이고 와서 된장냄새 나는 손가락으로 이런 소리를 나불대는 것도 참 민망하긴 하다.
마돈나의 풋풋했던 시절 사진을 보니 그녀도 오늘날 같은 삶을 꿈꾸었을까, 의도했던 삶일까 싶어서 그냥 떠들어봤다.



곱게 늙어야지. 노망도 정도껏 하고.




사진출처: madonnalicious.com   (Via 이정우-texts from the art & design front | 2004. 2. 2.- )

Posted by nuncoo at 11:58 PM | in Diary 2005 | Comments (3)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