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책이나 간단한 옷가지는 인터넷으로 사는 일이 많다 보니 모르는 번호가 핸드폰에 찍히는 일이 잦다. 택배회사 직원들이다. 그들이 전화해서 하는 말이래봐야 대개 매뉴얼대로라 상투적인 문답만 몇 번 오갈 뿐
길게 얘기할 일은 없었다.  젊은 배달기사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자신의 용무로 돌아간다. 수백 번 되풀이해서 전화를 받는다해도 인상적인 기억 하나 남기지 못할 흔한 일이다.


오늘도 전화가 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른 클렌징 오일 배달이다. 허나 목소리는 느리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하루 할당량을 절대 채우기 힘들 목소리다. 내 둔한 감각으로 가늠해봐도 그는 이미 나이 50을 훌쩍 넘었다. 오전부터 여러 군데 허탕을 쳤거나 중간에 오토바이가 고장났거나 물건이 잘못 왔다고 영문도 모른채 싫은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피로한 목소리는 아파트 위치도 꼼꼼하게 묻는다. 이전의 택배회사 직원들은 위치를 묻는 법도 없었다. 일에 이력이 붙은 젊은 기사들이었다면 두세 마디 대화로 끝났을 통화가 길게, 고단한 자와  자발적으로 그 고단함을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은 자의 대화모드로 길게 이어진다.
물건 맡길 곳을 알려주고도 할 말이 남은 사람처럼 저 편의 전화가 끊긴 다음에야, 그제서야 나는 전화를 끊는다. 나이 들고 피곤한, 그러나 성낼 줄 모르고 자신의 운명을 오래 참아온 이의 곤한 목소리가 오래도록 마음을 누른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도착한 물건에는 사소한 흠이 보인다. 전 같았으면 득달같이 전화해서 난리를 치고 반품을 했을 법도 한데 오늘은 체념이 쉽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밤마다 자신을 반쯤 죽였다 살렸다 하는 나에게,
이 위험한 나의 바운더리 안에... 곤하게 운명을 밀고나가는 늙은 배달원의  목소리 하나쯤 잔상으로 남아있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겠다.

Posted by nuncoo at 11:53 PM | in Diary 2005 | Comments (5) | TrackBack (0)

밤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다 보면 몇 주에 한 번씩은 섬뜩하게 자동차가 급정거하는 소리를 듣는다.
아파트를 뒤흔드는 파열음.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귀를 찢는듯한 비명소리는 긴박한 순간에 내가 만들어낸 환청이었을 것이다.
아침에 나가보면 나부끼는 현수막도, 드러누워 있는 분필자국도, 흉흉한 소문도 없다.


긴 밤, 머나먼 국경처럼 아득한 밤.





목숨을 걸 것이 없어 쓸쓸하다.

Posted by nuncoo at 02:30 AM | in Diary 2005 | Comments (4) | TrackBack (0)

소시

기생이 잊지못하는 다섯 남자는 머리 올려준 첫날 밤의 남자, 잘 생긴 남자, 힘 센 남자, 돈 많은 남자, 못 생긴 남자라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기억이 있다.
소시만화가게가 내게 각별했던 건 이 동네에 이사와서 첫 정을 주었던 만화방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정리되지않은 골목에서 만나는 광수체 간판의 글자는 산뜻했고, 벽화처럼 그려진 토토로는 이 만화가게가 세상의 많은 만화가게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풀어지는 봄밤 산책길에도, 우산 받치고 타박타박 걸었던 장마철 비린 밤에도 그 끝에 소시가 있어 나의 밤나들이는 꽤나 그럴듯했다.
근래에는 적을 두고 있는 만화&DVD 대여점만 해도 세 곳. 신간이 그때그때 구비되지 않는 점이 영 마음에 걸렸는데 ..몇 개월만에 가봤더니  이랬던  소시는 이런 모습으로 변해있다.

               

다행히 '아뜨리에'라 토토로도 광수체 간판도 그대로지만 왠지 섭섭하다.


불투명한 유리문에는 '미술교습- 개인지도' 라고 씌어진 A4용지 하나가 단촐하게, 허나 궁핍하지는 않은 모양으로 붙어있다. 그리고 왼쪽 유리벽에는 고흐의 자화상과, 오베르 성당을 흉내내서 그린 그림이 붙어있다. 주인이 그렸는지 학생이 그렸는지는 모르겠다


                

차마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밖에서 그림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문을 빼꼼히 열어보더니 비가 그쳤노라고 선생님께 전한다.



              





사진을 더 보려면 여기로 ....

Posted by nuncoo at 11:26 PM | in Diary 2005 | Comments (4) | TrackBack (0)

잎새

'잎새'란 말.. 참 예쁘네. 곤한 날들이라 내 속을 들여다볼 여유도 없고, 어쩌면 들여다보는 게 겁나기도 하고. 최근에 나를 위해 한 것이라곤 펜글씨를 자주 쓰자는 뜬금없는 결심뿐. 복잡한 고민 끝에는 늘 '펜글씨를 자주 쓰자' 같은 엉뚱하고 시덥지않은 결심으로 안착하는 게 나의 습성인터 결심이 발효될 즈음엔 그 근원은 잊은지 오래일 테지. 일터에서 어떤 이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넌 힘들 때 어떻게 하니?'라고 물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사적인 틈새가 전혀 없는 일터에서 개인적인 슬픔에 눈물을 흘릴수 있는 그녀의 자유가 부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여 어째 나는 서른 넘은 여자만 보면 다 내 피붙이 같을까.생각하다가 남 앞에서 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한 번도 자유롭지 못했던 내 울음이 가여워..라고  혼자 읊조리다가 그래, 펜글씨나 쓰자. 그래도 나이 서른 넘은 여자가 아무 데서나 울 수는 없지.
그나저나 '잎새'란 말은 참 예쁘네.

Posted by nuncoo at 11:50 PM | in Link & etc | Comments (3) | TrackBack (0)

해프닝

여기서 위여사는 출산을 위해 잠시 쉬고있는 나의 동료.
숫자 하나 잘못 찍었다가 소름이 확 끼치는 경험을 했다.
저런 문자메시지를 받으면 곧바로 전화해서 '나랑 놀면 되지 뭐'라고 하는 아저씨들이 있다는 것도 놀랍고.

Posted by nuncoo at 07:21 PM | in Diary 2005 | Comments (6)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