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행- 아흔 살 증조할머니와 열두 살 소리

느긋하게 만화책이나 볼 생각으로 뒹굴다가 맑고 순박해 뵈는 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만화책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 아저씨는 행복하세요?"
" 엄마 아빠랑 같이 사세요?"
" 아저씨는 좋겠다...  세상에는 돈만 있는 게 아니라 가정하고 가족이 중요하니까요"

SBS '생방송 투데이'라는 프로그램. 그 안의 꼭지 -신 인간극장 '아름다운 동행- 증조할머니와 열두 살 소리'에서 열두 살 소리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아저씨에게 하는 소리였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 열두 살 소리는 아흔이 된 증조할머니와 단둘이 산다.
엄마는 소리를 낳자마자 집을 나갔고, 아빠는 돈을 벌러 나간 뒤론 소식이 없다. 

열두 살 소리는 참 맑고 밝고 속이 깊은 아이다. 대뜸 '아저씨는 행복하세요?'라고 묻는 걸 보니 없는 엄마와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오직 소리만을 바라보고 아껴주는 증조할머니와 친구처럼 지내며 참 예쁘게 자랐다.
" 할머니는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뻐?"
" 가장 이쁜 사람 없어. 너 하나밖에."

그런 소리에게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다.
" 소리는 비가 싫어요. 할머니는 비가 오면 아프다고 해요"
아흔 살의 할머니는 노환으로 몸이 점점 쇠약해져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이제는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다.
아침잠이 많던 소리는 이제 새벽 6시면 벌떡 일어난다. 아침밥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늦어도 설거지도 다 하고 나간다.
" 나 없으면 할머니가 설거지를 하시니까 내가 하고 가야 돼요:"
열두 살 소리는 이제 할머니의 보호자가 됐다.

소리가 학교에 간 뒤, 할머니는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림들을 가리키며 묻는다.
" 글씨를 알테니까 ...그래서 내가 물어보려구. "
소리가 그린 그림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할머니는 궁금하셨나 보다.
" 글씨요?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쓰여있는데요?"

아흔 살 할머니와 소리는 키가 얼추 비슷하다. 허리는 굽을 대로 굽고 정신을 놓고 쓰러지는 일이 잦아지긴 했지만 그나마 할머니가 지금까지 버틴 건 소리라는 끈이 있기 때문이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갈 때를 준비해야만 할 것 같다. 힘겹게 일어나 장롱으로 간 할머니는 보자기로 둘둘 싸놓았던 통장 하나를 소리에게 내민다.
" 할머니 이거 왜 나한테 보여줘?"
" 나중에 나 죽어서 가버리면 누구한테 너 의지할 거냐. 할머니는 곧 죽을 사람이냐.
나이도 죽을 나이가 되고 더 살기도 안 바라는데, 남들이 더 살라고 해. 너 땜시 더 살라고. 
나이 90 된 사람더러 더 살라고.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오래 살라고만 해."
말을 하고 나서 먼저 울음을 터트린 건 할머니였다.  소리한테는 울지 말라고 하면서 할머니는 흐느껴 운다.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내며 친구처럼, 모녀처럼 알콩달콩 살아왔는데, 열두 살 저 귀여운 아이를 남겨두고 어찌 가시려고 ...할머니가 운다.

아흔 살의 증조할머니와 열두 살 소리가 서로 얼굴 부비며 살아가는 모습에 마음이 짠하고,
할머니가 떠난 뒤 소리가 느낄 상실감과 슬픔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지고...
그런 소리를 두고 떠나야 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면 눈물이 그치질 않는다.

방송시간이 저녁때라 그런지, 시청자 게시판에 가보니 대여섯 개의 글이 올라왔을 뿐이다. 혹시라도 방송 덕분에 나갔던 엄마와 아빠가 다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제발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할머니와 소리가 함께 있는 그림이 너무 애달프고 예뻐서 하는 얘기다.

Posted by nuncoo at 03:00 AM | in Diary 2005 | Comments (1) | TrackBack (0)

무제

제 생각을 말씀드린다면, 시간의 흐름은 '경년변화'인 것 같습니다.
쌓여가는 것도 있지만 마모되어 가는 것도 있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결산은 0이 되는 것이 보통이더군요.

Posted by nuncoo at 02:11 AM | in Diary 2005 | Comments (6) | TrackBack (0)

먼지와 한살림 혹은

대낮의 우울은 참으로 생뚱맞고 난감하다.
낮이라고 우울하지 않을 이유야 없겠지만 번잡하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일거리 앞에서도,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도 일관되게 우울하니 이건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몰라 무슨 말을 꺼내놓고도 저 혼자 정신을 놓기 일쑤다.
자동세차기 안에 들어가서 브레이크도 놓고 맥없이 앉아있으면서 여자는 잠깐 그곳이 편안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대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어딘가로 옮겨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대낮의 우울은 참으로 생뚱맞고 대책 없다.
내부세차를 돕던 아저씨는 '먼지하고 살림 차렸어요?'하며 까맣게 더러워진 걸레를 내보이는데 그때 언뜻 부끄러운 듯 웃었던가.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던가. 먼지와 한살림. 우울과 한살림. 이것이든 저것이든 대책 없는 오후.

Posted by nuncoo at 05:40 PM | in Diary 2005 | Comments (4) | TrackBack (0)

휴식

푹 쉬고나니 살 것 같아.



기분좋게 달달해지는 중.

Posted by nuncoo at 03:36 AM | in Diary 2005 | Comments (4) | TrackBack (0)

이상한 나라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어서야 시작하는 이상한 나라. 그 나라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 같던 이야기. 다시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지만 아, 문득 당신이 없고서야 시작할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문득 끝이어서야 시작할 수 있는 이상한 나라.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정말로.

이장욱 시집 ' 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사, 2002)' 중에서

Posted by nuncoo at 12:40 AM | in 책읽기 | Comments (2)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