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불안하다

불안 | 원제 Status Anxiety (2004) | 알랭 드 보통 (지은이), 정영목 (옮긴이) | 이레


1.
공항 서점에 들렀다가 비행기 안에서 볼 책으로 이 책을 고른 건 실수였다. 비행기가 날아오르자마자 몇 페이지를 들춰보다가 '아니올시다'싶어 덮어두었다가 들고 간 신문과 기내면세품 구입안내 책자까지 다 보고 .. 더 이상 읽을 게 없어서 펼쳤다가 '역시 아니올시다' 하며 또 덮어두었던 책이었다.
팔린다 싶으니까 막 찍어내는구나 투덜거렸고 가방 무겁게 들고 다닐 것 없이 여행지 호텔방에 두고올까.. 생각도 했던 책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던 이 책. 띠지에 박힌 두 줄의 문장이 요새 내 머릿속에 박혀있는 생각과 몹시 닮았다.

"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 ."
보다 유명해지고, 중요해지고, 부유해지고자 하는 욕망

감정이입하기 힘든 단어 불안, 욕망 ... 난 어째서 이런 질척거리는 단어를 머릿속에 담고 다니게 되었을까.


나는 지금의 내가 속물적인 욕망 때문에 괴롭다는 것을 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몰랐다. 내가 이렇게 욕망이 많은 사람인 줄 몰랐다. 
내가 이렇게 욕망을 채우는데 급급하고, 그걸 못해서 안달인 속물적인 인간인 줄 몰랐다. 내 집, 더 넓은 평수에 이렇게 집착하는 사람인 줄 몰랐고, '이 나이에 결혼까지 했으면 자동차 배기량이 2,000cc급은 되어야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인 줄 몰랐고 그게 충족이 안돼서 밤마다 기분이 시커멓게 멍들어 잠드는 사람인 줄 몰랐다.
이것이 채워진다 해도 나는 분명히 또 다른 욕망에 불안해할 거고, 그런 자신을 비웃거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써도 나는 내가 원하는 평안과 .. 수양의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할 것을 안다. 
이렇게 속물적이고 그릇이 작은 여자가 지금은 꽤나 노력하는 중이다. 잠시 헛 것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열등감과 불안에 시달리다가 비로소 나를 보기 시작하니.. 그나마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는 중이긴 할 거다.

2.
맥락이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는 .. 아는 어떤 여자의 이야기. 
결혼한 친구들 틈에서 씩씩한 싱글로 잘만 버텨오던 그녀가 어느 날 친구들 앞에서 꺼이꺼이 통곡을 하다시피 울어버린 일이 있다.
친구들은 몰랐다. 나이 서른에, 제도권 안으로 무사히 안착한 친구들 틈에서 그녀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너희들은 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모이기만 하면 남편얘기, 아이 이야기만 하는데... 그 얘길 들어야 하는 내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들보다 더 오래 연애하면서 결혼을 못하고 있는 내 처지를 떠올려본 적이 있느냐.' 
그녀는 자의로 독신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었다.
돈도, 빽도, 변변한 직업도, 핑크빛 미래도 약속해줄 수 없는 남자와 5년간 연애만 하고 있던 그녀는 자신이 자기처지를 그렇게 서럽게 여기고 있었는지 자신도 몰랐다며 요즘 부쩍 싱숭생숭하고 외롭다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자기 나이에 걸맞은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이 서른다섯에도 시집을 안갔거나, 마흔에도 코딱지만 한 전셋집에서 산다거나, 결혼을 했는데도 아이가 없다거나 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고리타분한 잣대에 휩쓸리지 말고 이탈해서 자유를 누리라고?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 혹은 그녀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욕망과 불안, 소외감 속에서 매일 아침 입술이 터지도록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이 징글징글한 세상으로 나선다는 것을.
'라브뤼예르'식으로 비꽈서 얘기하면 이렇다.
" 당신은 자유롭고 개화된 사람이다. 때가 지났는데 결혼을 하지 않았어도 꿀릴 것 없고, 가족친척들의 질시를 받고 하다못해 결혼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조차 소외돼도 상관 안 한다. 그저 당신의 삶을 사랑하며 아첨하지않고, 타협하지 않고, 살 뿐이다. 그래, 그래서 당신이 망한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외로운 것이다."  차라리 저주를 퍼부으라지.

3.
내 욕망 때문에 괜히 없는 병 만들지말고..소박하지만 재미있게, 열심히.
그리고 언제부턴가 까먹고 있었던 좌우명이랄까? 모토 같은 거...  " 스스로 긍지를 가지는 삶"  이렇게 살자고 다짐하는 요즘. 그래도 소망이 있다면 이런 거.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애정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식사를 하다 트림을 할 수도 있고, 목청껏 소리를 지를 수도 있고, 돈을 못 벌어도 되고, 중요한 친구가 없어도 된다. 그래도 귀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불안해 할 때마다 누군가가 일깨워줬으면.

Posted by nuncoo at 03:19 AM | in 책읽기 | Comments (5) | TrackBack (0)

New가 없는 이야기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그 사람과의 유효기간이 짐작된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근래에는 가늠해보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읽힌다.
내 어줍지 않은 통찰력에 놀란다기보다는 이것도 어떤 '끝' 혹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상심이 앞선다.

가령, 만나고 돌아서는 순간 '이 사람과는 이 일이 끝나면 다시 볼 일이 없겠구나.' 싶은 사람.
'5년, 10년을 같이 일해도 그는 내 속마음 한 자락 건드리지 못하겠구나.' 싶은 사람.
'열 번을 만나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열 번 내내 어색하겠구나!' 싶은 사람.

돌아보니 나를 둘러싼 사람들, 내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인물군은 근 5년 동안 변화가 거의 없다.
5년 전에 있었던 사람은 아직도 있고, 새로 흘러들어와 중요인물로 자리 잡은 사람도 딱히 없다.
그동안 혹하는 매력을 가진 어떤 사람이 나의 궤도 안으로 들어온 일이야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계기가 없어 잡지 못하고, 인연이 아니어 스쳐 지나갔다면 그건, 그것으로 되었다.

사실은, 오늘 문득 5년, 10년 후의 나의 인간관계도 오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않을 거라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 그 생각하다가 주절주절...

Posted by nuncoo at 02:21 AM | in Friends And Relations | Comments (3) | TrackBack (0)

양말

블로그들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다가 웃긴 게 있어서 나도 서랍을 열어보았다.
 애드키드님의 양말 

이건 내 양말.






나도 이 양말을 신을 때마다 웃겨 죽는다.
심지어 양쪽 발등에까지 앙증맞은 DAMA. -_- ;;
저거 신고 있으면 도저히 심각해질 수가 없어.
내가 막 웃겨지는데 그게 좋더라구.
양말의 출처는 모르겠음. 설마 내가 샀을라구.


DAMA동맹 하실 분, 양말서랍 좀 뒤져보지.

Posted by nuncoo at 12:51 AM | in Diary 2006 | Comments (0) | TrackBack (0)

with 김목경 아저씨

나도 떨리고 화끈거린다. 셔터가 눌러지기까지의 시간은 한참인 것 같고 셀프사진 찍을 때 익혀뒀던 표정도 나오지 않고 순식간에 바보 숙맥이 돼버린다.  앞에 앉으라는데 앉지도 못하고, 말 걸까 봐 피해다니느라고 괜히 이방 저방으로 왔다갔다... 좋은 사람 앞에서는 나도 그렇더라.  


또한, 좋아하는 사람과 허물없이 친해지는 법은 역시  학습으로 익혀지는 게 아닌가 보다. 멀리서 지켜보고 응원이나 하는 .. 지고 지순하고 바람직한 팬도 아니면서 이런 순간이 되면 무척 당혹스럽고, 그 당혹스러운 시간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나는 또 진땀을 빼고 만다. 
낮에 김목경아저씨와 사진을 찍는 나도 어색해하고, 허둥대고, 쭈뼛거리고 ..., 참으로 요건을 제대로 갖춘 숙맥이었다.  카메라를 가진 사람은 '붙어라, 앞으로 나와라' 주문도 많은데,  저렇게 뒤에 서있어도 저만큼 붙어있는 게 너무 떨려서  사진 찍는 사람이 '하나, 둘, 셋'을 세기도 전에 나는 정말 ... 거짓말 조금 보태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김목경 아저씨에 대한 나의 팬스러운 태도는 ...조승우나 이준기와는 방향이 전혀 다른데 ...., 이게 역사가 아주 깊다.  허나 지난 이야기는 구구절절 늘어놓아야 무엇하랴 (이러면서 뭔가 있는 척).  아저씨와는 10몇 년을 통틀어 세 번을 ..이렇게 근접한 거리에서 봤다 ('만났다'라고 썼다가 '봤다'로 고친다.)
10몇 년 전 처음 봤을 때 기타리스트는 수줍었고 나는 그 이름을 10여 년간 마음에 품고 산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후 재작년, 말하자면 접사가 가능한 거리에서 다시 만난 그는 조금 어렵고 무서웠다. 음악이 신념이 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엄격함 그리고 왠지 모를 거리감이 불편했다. 
2년 후 오늘 다시 만난 그에게 나는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한다. 쭈뼛거리며 얼떨결에, 그것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 농담같은 고백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10여 년 전처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 오래전 옛날, 이분은 아직 30대이고, 나는 아직 20대이던 시절 이분의 무엇에 내가 중고딩 때에도 마다했던 빠순이가 되기로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때 나는 분명히 어렸고, 영화 '파리 텍사스'  O.S.T에서 라이 쿠더의 연주로나 들었던 슬라이드 기타 소리를 직접 듣고 충격을 먹었던 것 같고 ... 기타를 치는 실루엣에 반하기도 했을 거고,  기타 치는 것 말고 다른 것에는 서툰 모습에서 나 혼자 교집합 같은 걸 만들어놓고 기꺼워했는지도 모른다.  마침 그 시절의 나도 막 일을 시작한..., 뭣도 모르는 사회초년생이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만남에서 두 번째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두 번째에서 세 번째는 금방이었지만, 네 번째는 또 언제가 될지 모른다. 그때 내 마음이 어떨지도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떨림은 아주 신선하고 감격스러운 것이라 어느 곤하고 무감한 날에 들춰봐도 좋지 않을까 싶어 .. 여기 적어둔다.

그리고 이 사진은 폴더를 뒤지다가 나온 거. 작년 여름이었나 보다.
영화 '우리형' 덕분에 한참 바쁠 때 박지빈과 Jr 그리고 여사님.


'사진을 찍는다, 너도 와라, 같이 찍자. 잘 나왔네, 못 나왔네.'  벌써 아주 오래전 일만 같은 그날의 시추에이션.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여전히 철이 들지않는다.
 

Posted by nuncoo at 11:58 PM | in Diary 2006 | Comments (5) | TrackBack (0)

백만년 만에 '이탈한 자가 문득'

유행가 흥얼거리듯 오늘따라 자꾸... 입에 고이는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별똥 하나 싸지르지 못하고 죽어라 궤도만 돌고있으니 죽을 맛인 것이다.

Posted by nuncoo at 11:53 PM | in Diary 2006 | Comments (0)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