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들려준 이야기

남자는 눈에서 불이 났다고 했다.
그녀가 그렇게 쉽게... 물론 연애중에도 적극적인 건 남자 쪽이었지만 전화로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그렇게 떠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여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고민해왔노라고,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남자의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미칠 지경이었던 남자는 종일 남자는 술을 마셨다고 했다. 그리곤 고속버스에 올랐다. 방학이라 고향으로 내려간 그녀가 있는 곳 마산집으로 찾아가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며,어깃장이라도 부려볼 참이었다. 아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는 금방이라도 고꾸라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고 했다.

사랑에 빠진 것도 그가 먼저였다. 몇 달간 애만 태우다가 사귀자는 고백을 했고 그 후로도 또 몇 달간 공을 들인 끝에 남자는 여자의 공식적인 애인이 되었다. 대개의 연인들이 그렇듯 다투기도 하고 헤어질 위기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끝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버스 안의 남자는 취기에 감정이 고조되어 그동안 자신이 잘못했던 일들을 혼자 꺼내놓고 찔끔찔끔 눈물까지 흘린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남자가 된 것 같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기 위한 건데 무슨 일이든 못하리.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렸던 베르테르니 로미오 같은 인물들을 떠올리며 남자는 눈물을 닦고 비장한 눈빛으로 창밖의 어둠을 본다.
요의가 느껴진 건 바로 그때였다. 남자는 술을 마시는 동안 자신이 한번도 화장실에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맥주에 소주를 섞어먹고 안주로 홍합탕까지 먹었으니 방광은 부풀대로 부풀어 용량초과를 넘어서고도 남았을 것이다.
남자는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자세를 여러번 고쳐 앉는다. 시계를 보니 마산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두 세시간은 더 가야한다. 휴게소는 이미 지나쳤는데 그때는 마침 여자 집에 도착해서 건넬 말을 고르느라 휴게소에 서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남자는 서서히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여자생각이고 뭐고 온 신경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아랫배에만 쏠린다.
어찌나 힘을 주고 안절부절인지 의자 끝으로 뺀 엉덩이가 슬쩍 허공에 떠서 앉는둥 마는둥이다. 진작에 화장실에 다녀올 걸, 술을 마시지 말 걸.. 순간 상태가 안좋은 길바닥을 지나는지 버스가 잠시 요동하는 사이 참고있던 그것이 찔끔. 급기야 남자는 참고있던 소리를 지르고야 만다.
" 기사님! 잠깐만요... 잠깐만 세워주시면 안될까요?"
" 녜? 이 양반이 무슨 소릴.."
" 진짜 급해서 그러거든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아니, 여기는 고속도.."
" 그게...쌀 것 같다니까요"

남자는 마산에 도착하자마자 여자의 집에는 들르지도 않고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다.
그렇게 절박했던 것이 요의에 시달리면서부터는 아무 생각도 나지않고, 그저 오줌만 눌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밖에는 안들더라고 했다.
트럭들 세워놓는 갓길에 버스를 세워두고 수풀에서 일을 보는 순간,
찬 바람에 얼굴을 내놓는 순간,
술이 깨면서 온몸의 막혔던 것이 왈칵 쏟아지는 순간, 그걸로 한 사랑이 끝났구나 실감이 나더라고 했다.
다 그런 것이다.

Posted by nuncoo at 03:10 AM | in Diary 2004 | Comments (24) | TrackBack (0)

404 not found

영란이. 중학교 2학년 때 쪽지에 '점철'이라는 말을 적어서 사전을 찾게 만들었던 아이. 키 크고 얌전했던 영란이는 결혼했다는 얘기만 전해들었을 뿐 연락이 되지 않고.
민욱이.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딱 이틀 보았고 그 이후론 영영 소식을 알수 없는 아이. 야외스케치를 나간 그 날 내 옆에만 앉던 아이. 도시에 살고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만들었던 선생님의 조카 민욱이는 싸이도 하지 않고.
L선배.Marie Laforet를 처음 알려준, 청승맞게 Viens,Viens만 물리도록 듣던 그 선배는 전화번호도 잊어버렸고.
경아언니.인도의 어느 유스호스텔에서 의자가, 천정이 다 모자이크처럼 쪼개져서 빙빙 돌기만 한다며 엄살 떨며 널부러져 있던 나를 등 두드려고 배 문질러 주며 밤새 간호해주던 언니.  누군가의 정신을 통째로 훔쳐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런 사람을 현실에서 마주하기는 그녀가 처음. 하지만 그 언니가 보내준 마지막 메일, 삭제된 그 메일은 영영 복구되지 못할테고.

최근에는 자주.. 힐끔힐끔 넘겨보던 블로그 두 곳이 문을 닫았다.

Posted by nuncoo at 11:59 PM | in Diary 2004 | Comments (5) | TrackBack (0)

관계

당신들은 나에게 무엇인가.

자주 얼굴 보면서 언젠가 한 번 쯤은 같이 밥 먹으면서 찌개를 나눠 먹은 적도 있었을텐데 주말에 뭘 하는지, 친한 사람을 만나면 어떤 식으로 웃는지 알지 못한다.
얼굴 보면 잘 지냈느냐, 지금은 어디 사느냐 호들갑스럽게 반가워하며 뒷날을 기약하겠지만 어쩌다가 당신에게 전화 걸 일이라도 생긴다면 두세 명은 거쳐야 당신 번화번호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전화를 건 나는 뻔한 인사를 녹음기처럼 읊어대며 어느 타이밍에 본론을 꺼내야 할지 몰라 무척이나 조바심을 내며 불편해 하겠지. 그런 나에게 당신은 무엇인가.
아침저녁으로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만나고 헤어지지만 나 속상한 일이 생긴다해도 '나의 얘기를 들어주세요'라며 당신을 붙잡는 일은  없을테고. 당신이 결혼을 하거나 아기 돌잔치를 하게 된다면 마땅히 방문하여 축하하고 박수를 쳐주겠지만 주말에 영화를 보자고 전화하는 일은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겠지. 당신은 나에게 무엇인가.
잘못된 처사에 함께 분개하고 신문기사를 돌려보았지. 그래도 '어젯밤에 펑펑 울다 잠들었는데, 혹시 그런 적 있어요?' 이런 질문 따위를 건넨 적은 없다. 함께 수다를 떨며 웃은 기억이 없지는 않은데, 안보이는 며칠간 당신의 안부도 궁금해질까?
당신에게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이 자동으로 제어가 되서 어느날 보니 그렇게 용의주도한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질 때.당신은 내게 무엇인가.

'누구누구 알아?'라고 누군가 나에게 물었을 때, 떠오르는 것이 당신의 이력 몇 줄 이었을 때..'알긴 아는데 잘은 몰라'라고 말문을 닫고 말 때. 그러고 보니 당신들과 얼굴을 마주치며 지낸 지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사적으로는 만난 적이 한 번도 없고, 사실은 내가 당신들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결론에 맞닥뜨렸을 때.. 당신들도 결국은 나와 마찬가지 일 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 때..

누군가 '누구랑 친해?'라고 물었을 때 대답보다 '이건 몹시 복잡한 질문이잖아'라는 생각이 먼저 들 때.
'안친해'라고 말하자니 그럼, 함께 보낸 시간은 다 무엇이었나 싶고
'친해'라고 긍정하자니 겉으론 허물없이 어울리는 듯해도 '나는 한번도 그에게 나의 속내를 보인 적이 없었다'라는 생각에 망설여지고
'60%정도 친해'라고 말하자니 채워지지 못한 40%를 설명하는 게 번거롭고
'나한테는 여러가지 내가 있는데 그 중에 3번 번호표를 달고 있는 나와는 아주 친해'라고 말하자니 더 복잡하고 
 '친한 사람'과 '안친한 사람' 이 두 가지 분류 말고 좀더 면밀하고 섬세한 분류는 없는 것일까? 생각도 해보다가
결국은 '어느 면에서는 친해'라고 나에게는 가장 근접한 대답이나 대답을 기다린 이에게는 모호하기 그지 없는 말로 마무리 짓고 말 때.

잘 아는 듯, 친한듯 하지만 돌아서면 결국은 아무 관계도 아닐 수도 있는.
당신들을 어느 범주에 끼워넣어야 할지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
나는 묻는다. 당신들은 나에게 무엇인가.

- 종일 잔 후에,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미니홈피를 어슬렁거리다가.

Posted by nuncoo at 01:23 AM | in Diary 2004 | Comments (16) | TrackBack (0)

Morning Mart

1.
 "오징어맛이 다 나갔네요" 관계(?)의 시작은 아마도 이 말 한 마디였을 것이다.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두 번 들러서 햇반이나 콜라를 사갔을 뿐인데.
거스름돈이 남으면 동전 짤랑거리는 게 싫어서 맥스봉 치즈맛, 오징어맛.. 그 중에 오징어맛을 몇 번 골라갔을 뿐인데.
더구나 그날은 맥스봉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맥스봉 오징어맛이 떨어진 게 자기 잘못인양 안타까운 억양으로  처음 말을 건넸다
" 오징어맛이 다 나갔네요"

2.
편의점도 아닌, 그렇다고 수퍼마켓도 아닌. 그저 어정쩡한 형태로 밤새 불을 밝히고 있는 가게의 젊은 주인과 눈을 맞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동네에 살면서 6개월 이상 그 가게를 들락거렸는데도 계산대 앞에만 서면 시선은... 맥스봉 소시지 통이나 사지도 않을 껌, 양주 따위만 훑어내렸다.
젊은 나이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서서 하루 종일 계산대 앞에서 책을 보거나 동네 아저씨들에게 담배를 팔고 거스름 돈을 내주는 남자는 과연 어떤 이력을 가졌을까?
가게 앞 간이 탁자에 널부러진 맥주병을 치우던 그가 그 자리에 풀썩 앉아 지나가는 자동차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횡단보도 저 편에 서 있던 나는 .. 그가 어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떤 경계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전의 이력이야 어쨌든 간에 계산대 앞에 설 때는 복잡한 내면은 떨치고 잊어야 하는데, 그것만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저렇듯 심란한 표정으로 가게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3.
며칠간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인듯한 아주머니가 가게에 텔레비젼까지 켜놓고  "담아줄까?" "뭐 찾아요?"  "안녕히 가세요" 
그 남자보다 열배 쯤 많은 말을 쏟아내며 가게를 지켰다.
어딘가 취직을 했나보다... 어쩐지 안어울리는 사람이더라니... 그 안경에는 책상 앞이 어울리지... 그래도 그 곳에선 그렇게 복잡한 얼굴로 가슴 철렁하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이런 생각들을 하며 안도했는데
오늘은 다시 그 남자다.
똑같은 모습으로 계산대에 서서 "오징어맛이 없네요" 한다.

4.
아파트 뒤편에 페밀리마트가 새로 들어섰던데 그곳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Posted by nuncoo at 03:28 AM | in Diary 2004 | Comments (13) | TrackBack (0)

곰의 집

'곰의 집'이 어딘고 하면... 여길 누르면 되고 /2004/08/26



새우-오늘의 실험대상. 꼬리까지 먹는 사람 셋. 머리 속까지 몽땅 비워 먹은 이 하나.
미사리-오늘 회합의 동기를 준 이. 전출후 체질 개선 요함.
푸우-오늘의 메인 내비게이터. 빠르고 정확한 길 안내. 카메라 앞에선  '유일신과 성전'.

미사리.
위여사-내일 모레면 진짜 여사.결혼식을 앞두고 약간의 우울증.
오!그녀 -오늘의 서브 내비게이터.
스물한 살 때. 첫사랑과 이별한 후 일 년 동안 외국을 떠돌았다는...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

Posted by nuncoo at 12:50 AM | in Friends And Relations | Comments (9)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