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무슨!

1.
낮에 파리의 연인 재방송을 보다가 .

기주: 아니.. 근데 언제까지 한사장, 한사장 할꺼야?
태영: 아니, 그럼 뭐라고 불러요?
기주: 나이도 한참 어리고 쬐그만 게 오빠라 그래.
태영: 어우~ 그럼 닭살 돋게. 오빠?
기주: 아니다. 하지마.
태영: 아니, 하래놓고 하지 말라는 건 뭐예요. 해 볼래요. 오빠!
기주: 이상해. 하지마.
태영: 아니, 왜 못하게 하냐.... 오빠.



2.
중학교3학년 때였나?  동네 오빠와 사귄 적이 있었는데 ( 그땐 사귄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우리 아버지는 남자랑 말만 해도 큰 일 나는 줄 아는 분이었던지라 이성교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던 거라.
그런데 어느 날은 내가 교회에도 통 나오지 않고 쪽지도 뜸해지자 나랑 모종의 교감이 있었던 이 오빠,
걱정스러운 마음에 우리 집엘 찾아왔는데, 온 사람 내칠수도 없는 노릇이라 안들키게 몰래 내 방에 앉혀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쑥스러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있는데 밖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 
" 누구? 누가 왔다구?"
빈 집에서 허공에 대고 방백하지 않는 한 그것은 분명 나 들으라고 하시는 소리였는데 해석해보면
" **야, 니 방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리는데 어떤 놈이냐?"
이런 말에 다름 아니었던 거라.

아버지에게  '남자'라는 이성과 같이 있는 모습을 처음 보이는 상황이라 당황한 나는 " 이 오빠는요.."
그 오빠는 " 안녕하세요 저는.."

몹시도 허둥대며 두 사람의 말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얽히고 겹쳐서 ..제대로 매듭도 짓지 못한채
가뜩이나 살벌한 분위기를 더 아찔하게 만들었는데.
우리 아버지, 그 오빠한테는 본척도 않고 내 얼굴만 모로 돌아보며 말씀하시는거라.
"오빠는 무슨! 니가 오빠가 어딨어?"

딸만 넷에 아들이래봐야 막내 하나뿐이었으니 그 말은 그 자체로도 맞는 말이었으나
결국은 둘이 좋아라 어울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풍유에 가까웠으니 그후로 나는 어린 딸의 풋풋한 정을 이해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괴로운 사춘기를 보내야만 했단 말이지.

3.
말 많고 살가운 모녀간은 아니었으나 30여년 동안 해준 숱한 말 중에 다른 말은 다 잊고
"오빠는 무슨, 니가 오빠가 어딨어?"
이 말만 똑똑하게 기억하는 걸 안다면 우리 아버지도 몹시 서운하시겠지만
아버지의 그 말씀은 나의 예민했던 사춘기를 지배했던 지라
충격이 커서 세뇌가 되었는지 어쨌는지 '오빠'는 나의 금기어가 되고.
성년이 된 후에도 나는 오빠를 오빠라 하지 못하고,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는 모조리 뭉뚱그려 선배 아니면 누구누구씨로 통칭되었으며
한때 사귀었던 사람들조차 살가운 '오빠' 소리 한번 못듣고 '어이~'나 ... '있잖아'... '저기' 로 호칭도 없이
나의 뿌리깊은 '오빠기피증'에 굴복해야만 했는데.


3.
지금 돌아보니 좋아하는 사람한테 '오빠, 오빠' 하며 앵앵거려 보지도 못하고 좋은 세월 다 갔다는 생각도 드네.




 

Posted by nuncoo at 11:45 PM | in Diary 2004 | Comments (7) | TrackBack (0)

언니

1.
일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전화를 받았다.
어제쯤 돌아왔겠거니 했는데, 언니가 먼저 전화를 했다.
어느 날 누군가에게 막내를 '자식같은 동생'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발설하는 순간 '나도 언니에게 자식같은 동생이었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언니였다.
안면도로 온가족이 함께 가족연수 비슷한 걸 다녀온 터라 많은 걸 시시콜콜 물었어야 했는데,
나 또한 바쁜 와중이었기에 '좋았나, 안좋았나' 대답만을 채근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서두르는 나의 목소리에 무엇이 어땠고, 저것은 어땠고 주절주절 늘어놓을 언니가 아니다.
"아이들만 좋으면 됐지 뭐"
그걸로 언니는 급히 전화를 끊는다.

2.
연애시절 언니와 형부는 인천시립도서관에서 데이트를 했다.
일요일 아침 드라이어 소리에 깨어보면 언니는 거울 앞에 소녀처럼 앉아있었다.
" 어디 가?"
" 응, 도서관"
그런 날 저녁이면 언니는 겨드랑이에 새 책 한 권을 끼고 들어왔다. 나는 그 남자와 결혼하라고 했다.

3.
흔한 일인지 모르지만 언니의 결혼식 사진에는 사진마다 내가 끼어있다.
가족사진에는 당연히 있고, 친구들끼리 빙 둘러서 찍은 사진에도 내가 있다.
여기까지는 내가 자의로 한 짓이었고 친구,선후배가 모이는 피로연 자리까지 낀 것은 언니의 부탁 때문이었다.
당시 언니의 친구들은 거의 다 유부녀였다.

4.
"아이들만 좋으면 됐지 뭐"
뒤늦게... 전화를 끊고나서도 한참 후에야 그 말 한 마디에 심하게 넘어진다.
모성에 감탄해야할 상황이었나 싶기도 하지만 나는 언니가 조금 더 이기적이 되기를 바란다.

5.
"아이들만 좋으면 됐지 뭐"
세상의 여자들이 온전히 엄마가 되어 내는 소리는 다 슬프게만 들린다.
나는 여전히 진도가 느리고
늦되고 늦되다.

황규백/두 개의 우산/1990/22.5*40

이미지 출처: http://www.kcaf.or.kr/art500/hwangkyubaik/index.htm

Posted by nuncoo at 02:35 AM | in Diary 2004 | Comments (3) | TrackBack (0)

메신저 접속

오랜만에 MSN 메신저에 접속.
실명인 사람 둘. 아이디로 각자의 근황과 의지를 피력하는 사람 일곱.

아이디 하나씩을 훑어보며 온라인에 없는 사람들에게 나 나름의 방식으로 인사를 건넨다.
모두 무사히 잘 지내냐고.
만약 접속 중이었다면 나에겐 비밀이 없었을 거라고.
가끔 이렇게 시시콜콜 죄다 고하고 싶은 날. 당신들은 약속이나 한듯 모두 어디론가 숨어버렸더라고.

Posted by nuncoo at 03:54 AM | in Diary 2004 | Comments (14) | TrackBack (0)

그녀

우리 참 오래도 사귀었다. 이 대목에서는 '징하다'는 표현이 제법 잘 어울릴듯 싶다.
서로의 인생에 어줍게 답글 달며 지내온 게 10년이 넘었다니...
태생이 다르고 외양이 다르니 종국에는 많이 틀어질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결국에는 너와 나. 비슷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더라.

우리 둘 다 인생이 박복하여 호들갑스럽게 서로를 치하할 일도 없었고
번갈아가면서 서로의 불행을 다독여주며 지난 10여년을 보냈지만.
언젠가는 깔깔거리면서 서로의 역사를 증언할 날도 오겠지.

지금 이 시각. 일 하기 싫어서 커서만 노려보고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더 있다는 것이.
그게 너라는 것도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Posted by nuncoo at 01:53 AM | in Friends And Relations | Comments (10) | TrackBack (0)

뭘 했나

오늘 ...그들...

각자의 상황에서 나름대로 바빴다.
여러가지 관계와 조합으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Posted by nuncoo at 10:51 PM | in Diary 2004 | Comments (3)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