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 진정한 사랑이 뭔지 내가 말해보지. 좋은 예를 하나 들게. 그런 다음 각자 결론을 내려봐."
멜은 이렇게 말하며 자기 잔에 진을 좀더 따랐다.
" 우리가 사랑에 대해 정말 알고있는 게 뭘까? 사랑에서 우리는 초보자일 뿐인 것 같아.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서로 사랑하기도 하지. 그 점은 의심치 않아. 그런데 가끔 내가 전처 역시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게 되면 헷갈리기도 해. ... 전처를 생명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어. 하지만 지금 나는 그녀를 혐오해. 그래, 이건 어떻게 설명하지? 그 사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사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난 알고싶어. 누군가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어...
만약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요- 바로 내일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상대. 그러니까 다른 한쪽은 한동안 슬퍼하다가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곧 다른 누군가를 만나 다시 사랑을 하게 될 거라는 거야. 그러면 이 모든 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모든 사랑이 그냥 추억이 되겠지. 내 말이 틀렸나? 근거가 없나? 난 알고싶어. 내 말은, 난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거야."

-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What We Talk When We Talk About Love) 중에서. 말줄임표는 내 맘대로 생략한 부분.
레이몬드 카버 (지은이), 정영문 (옮긴이), 문학동네

엊그제 마침 여유가 생겨서 엄마와 하룻밤 자고 올 요량으로 어버이날 이후 약 3주만에 서해대교를 건넜다.
초저녁에는 다행히 고마운 분도 놀러오셔서 적막했던 집안에 모처럼 사람 목소리가 흘러넘쳤다.
아버지가 떠나신 이후... 우리집에 들르는 사람들은 모두, 엄마에게는 고마운 분으로 통했다. 저녁에 전화를 하면 엄마는 그랬다. " 고맙게도 ... 시내네 아줌마가 와서 같이 있다. 혼자 있다고 말동무 해준다고 와주니 얼마나 고맙냐."
나도 먼 곳에서나마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마음으로 그랬다." 그러게, 정말 고마운 분이네"

고마운 분이 가고나면 늘 혼자였을 엄마는 내가 있어서 안심했는지 아홉시 뉴스가 끝나자 잠이 들었다.
텔레비전 정규프로그램이 다 끝나자 아버지가 늘 기대고 앉으시던 장롱에 등을 대고 앉은 딸은 레이먼드 커버를 읽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집에만 내려가면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집에 갈 때면 늘 책 한 권씩을 챙기는데, 이번에는 가볍게 보자고 골라온 것이 ...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레이먼드 커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이었다.
이렇게 침울한 밤에 아슬아슬 금이 가고 파멸에 이른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책을 잘못 골라왔군.. 싶지만 새벽이 되기까지는 한참이 남았고, 다른 방법이 없다.
이 불행했던 작가는 소설 속에서도 균열되고 서로 할퀴고 상처입은 파멸의 순간만을 포착한다.
'이전에는 조금 행복했을지 몰라도 지금의 너희들은 아니야. 이렇게 불행하고 이렇게 일그러졌고...이미 다 깨졌어.'라고 말하는듯... 그의 어투는 단호하고 읽는 이는 외로워진다.
덩달아 외로워진 나는 책갈피 너머 엄마를 본다.
70여년을 살면서 역시나 많은 파멸과 고독의 순간을 경험했을 엄마는 상처입은 어린 동물처럼 아프게 누워 가까스로 잠들어있다.

" 이 일이 있은 건 몇달 전이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나이 든 부부가 있었어. 어떤 애가 차로 그들의 차를 받았고, 그들은 온몸이 엉망으로 찢어졌지. 누구도 그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중에서도 여자 쪽이 더 좋지 않았지. 온몸이 말이 아닌데다가 비장까지 파열되었으니까. 양쪽 무릎 연골도 파열되었지... 나는 그들 두 사람을 매일 같이 보러 갔어. 때로 다른 연락이 오면 하루에 두 번씩 들르기도 했지. 둘 다 모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깁스와 붕대를 하고 있었어. 영화에서 그런 장면 봤을 거야. 그들은 정말 영화처럼 하고 있었어. 작은 눈 구멍과 콧구멍, 입구멍만 있었지. 거기에다 그녀는 다리까지 매달고 있었어. 남편은 오랫동안 아주 절망적이었어. 아내가 나아지리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자포자기 상태였어. 하지만 그 사고 때문만은 아니었어. 내 말은 그 사고가 하나의 원인이긴 했지만 모든 원인은 아니었다는 거야. 나는 그의 입 구멍에 귀를 대곤 했어. 그는 사고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눈 구멍을 통해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했어. 그게 자기를 상심하게 한다고 했지.
상상할 수 있어? 그는 머리를 돌려 자기 마누라를 볼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던 거야.
내 말은, 그 늙은이가 망할놈의 마누라를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는 거야...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알겠어?"

수십년을 징하게 봐온 망할놈의 할망구를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는 노인. 사랑은 그때쯤이나 되어야 이야기할 수 있는 걸까? 
고개를 돌려 남편을 볼 수 없으니 엄마도 얼마나 아팠을까? 
지금까지 앓았던 70년 묵은 상처들이 일시에 다 터져버린듯 너무 아파서 그래서 밤마다 약없이는 잠도 못자고 가끔은 혼자 눈물도 훔치면서 마지못해 살아내고 있는 걸거야. 그래도 엄마가 힘을 내주어야지. 고마운 분이 초저녁에 말씀해주셨듯이 1년이 지나면 그래도 조금 나아진다잖아. 일이 고된 날은 생각도 안나고 정신없이 곯아떨어지게 된다잖아.

중간에 들어있는 단편 ' 우리가 아버지를 죽인 세번째 이유'는 차마 보지 못하고 그냥 넘겨버렸다. 엄마는 병원24시나 환자들이 나오는 프로그램만 봐도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는데, 나도 아버지와 죽음이 한데 뒤섞여있는 이야기는 그것이 차마 소설이라고 해도 아직은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마지막 뒷 날개를 덮었는데도 시간은 아직 4시가 되지 않았다.
소설 속에 펼쳐진 상황들이 너무 삭막하고 섬뜩해서 얼른 그 속에서 벗어나려고 눈으로 방안을 훑고있는데 마침 엄마가 깼다.  그 뒤 둘은 창 밖이 환히 밝아올 때까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 한숨도 못잔 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곧 엄마가 홀로 계신 그곳을 떠나와야했다.

in 책읽기
Posted by nuncoo at June 3, 2005 01:42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