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12-플라멩코

[평생 잊을 수 없는 여행지 40] 이라는 책을 보다가 잊고 있었던 스페인의 기억을 호출해본다.
사진의 촬영날짜를 보니 2월.  불과 몇 개월 전인데 오래전 일 같다.
여행의 기억이란 게 그런가 보다. 이국의 골목을 누비던 일이나  낯 설었던 밤공기가 어느 날은 간밤의 일 같은데, 또 다른 날에 돌아 보면 까마득한 옛일 같기도 하다. 
거대한 성채 안에 아기자기한 구조물을 곳곳에 숨겨놓았던 알함브라의 도시 그라나다. 그날 밤 나는 스페인에 왔다는 것을 완전하게 실감한다. 그라나다에는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플라멩코가 있었다.









스페인으로 출발할  때 짐작으로는 '세비야쯤에 가면 플라멩코를 보게 되겠지.' 생각했다.  근데 그라나다에서 봤으니 예상보다는 조금 일렀던 셈이다.
플라멩코를 공연하는 곳을 보통 타블라오(Tablao)라고 하는데, 그라나다에서는 사크레몬테 언덕에 있는..., 집시들이 살던 동굴이 타블라오 겸 주점 같은 곳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매일 밤, 이 곳에는 동굴마다 플라멩코 공연이 펼쳐지고 2,30명이 전부인 관객은 대부분 동양인이다.   내가 갔던 날도 네댓 명을 빼고는 다 동양인이었는데, 특히 일본인 단체관광객들이 자리를 채워줘서 박수 소리는 꽤 풍성했다.

동굴식으로 된 타블라오 천장.
캐스터네츠나 손뼉 대신 저런 걸 두들기기도 했나 보다. 나름 근사했다.

사진은 아직 공연이 시작되기 전. 
저 앞에 무희 넷이 대기를 하고 있고 빈 의자도 버스가 실어올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전에도 소개했던 '호텔 알릭사레스' 프론트에서  '오늘 밤 플라멩코 보러 갈래?' 라고 제안을 하길래   '그래, 얼른 플라멩코나 보자' 하는 마음에 O.K해서  저길 가게 된 거고, 관람료는 1인당 25유로. ( 음료 1잔이 포함된 가격. )
9시 30분 정도에 우릴 데리러 온 미니버스는 그라나다 시내의 몇몇 호텔을 들러 사람들을 태우고 이 동굴식 타블라오 앞에 내려놓았다.







첫 번째로 나온 여성 무희와 노래하는 남자, 기타 치는 남자.
플라멩코 공연을 볼 때는 춤만 보지 말고 기타는 물론, 노래에도 주목하라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적이 있어서 유심히 보았다. 
고생을 많이 한 해리슨 포드 같은 느낌의 기타리스트는 정말 열심히 기타만 치는데,  그 밤이 그닥 즐거워 보이진 않았다. 늙은 기타리스트의 모습은 어딘가 슬퍼 보이는 것도 만국 공통인가? 아무튼.
노래(칸테)는 흡사 우리나라의 노동요나 민요를 듣는 느낌. 왼쪽의 대머리 아저씨가 힘들이지 않고, 중얼중얼 읊는데..., 꽤 구슬프게 들린다.

아, 초기의 플라멩코는 기타연주도, 캐스터네츠도 없이 반주는 오직 손뼉을 치는 것만으로 이루어졌고, 춤추는 이도 구두를 신지않았다고 한다.

독무가 끝나면 남녀, 혹은 저렇게 여자,여자끼리도 같이 춤을 춘다.
왼쪽의 땡땡이 그녀는 이 업소에서도 가장 춤을 잘 추는 축에 속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표정연기와 발을 구르는 힘, 절도있는 동작, 풍겨나오는 에너지 모두 다른 이보다 압도적이었다.
아, 신체 발육상태도 물론 동양인이 주눅 이 들 정도.;;;;

'타블라오'라는 말은 원래 '판자를 깔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동굴식 타블라오 바닥에도 널빨지가 깔려있는데,  군데군데 벗겨진 부분들이 .. 매일 밤 이 동굴 안의 풍경이 어떠할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무희들이 신은 반짝거리는 에나멜 구두는 저 널빤지 위에서 경쾌하게 부딪치고 구르며 노래를 불러내고, '올레!' 호응을 끌어내고 기타를 호령한다.
그 소리와 몸짓에 압도되어 한껏 격앙된 채 무희를 보면 이미그녀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기 일쑤다. 
플라멩코는 체력 없이는 안된다.;;;









관객들은 아무래도 플라멩코를 관찰, 혹은 체험차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적절히 흥을 돋우는 게 서툴다.
그래서인지 댄서들은 자기 순서가 끝난 후에도 자리를 뜨지않고, 의자에 앉아서.. 춤 출 때만큼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고, 분위기를 돋운다.
첫번째로 춤을 추었던 여성 댄서와 말총머리 남자 댄서도 열심히 손뼉을 치고 있는 중.  말총머리 아저씨는 춤을 꽤 열심히, 잘 추었지만 춤추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여기에 뽑히는 행운은 누리지 못했다.  
막판에, 안토니오 반데라스 같은 타입의 아래... 긴 머리 총각이 등장하는 바람에 ... 밀렸다.

공연이 한참 뜨거워질 무렵 물에 젖은 긴 머리를 느끼하게 휘날리며 나타난 총각.  처음엔 서빙하러 온 총각인 줄 알았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바쁠 땐 서빙도 하면서 누님, 형님들한테 춤도 배우는 견습생 정도 되는 것 같다.
이날도 의자 한구석에 앉아있더니 다른 댄서들이 '너, 한 번 해볼래?'  '그래, 쫙 빼고 나온 김에 어디 한 번 춰 봐. '  하니까 득의양양해서 널빤지에 오른 분위기.
근데 어찌나 폼을 잡고, 구경꾼을 의식하던지 말총머리 아저씨보다 백배는 더 느끼했다.
위장된 격렬함은 보는 사람에게는 소화불량이라는 것도 만국 공통?

in After Traveling
Posted by nuncoo at May 22, 2006 11:57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