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7

"옛날 조나라의 서울인 한단 사람들 걸음걸이는 보기 좋기로 소문나 있었던 모양인데, 어느 실없는 연나라 사람이 그 걸음걸이를 배우러 갔다가 제대로 배우는 것은 고사하고 제 연나라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하는 수 없이 기어서 돌아왔다... 이런 옛이야기가 있다.
소설 쓰는 일을 걸음걸이에 견주면 내 보법이 그 짝이다. "

시간의 눈금 - 이윤기 (지은이) | 열림원


같은 글이라도 소설의 문장이 다르고, 번역 글이 다르다.
같은 입말이라 해도 라디오 글이 다르고, 드라마 글이 다르고, 대낮의 글이 다르고, 밤의 글이 다르다.
편지 글이 다르고, 시 글이 다르고, 신문 글이 다르다.
입으로 읽혀질 글이 다르고, 활자로 읽혀질 글이 다르다.
그리고 글자로 씌어졌다고 해서 다 글이 아니다.
나는 이리저리 갈지자로 걷고있다고 생각했는데, 기어다니는 꼴에 가깝구나.    
한단지보(邯鄲之步)를 가슴에 새긴다.

Posted by nuncoo at 05:15 AM | in 문장수집가 | Comments (0)

0731

친구의 블로그에서 퍼온다.
=============================================
아드리아 해에 면한 항구도시 바리에서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을때였다.
페리가 떠나는 터미날에는 동유럽 악센트로 떠드는 승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몇몇은 의자에 누워 잠을 청하며 배가 떠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밤이 깊어 커다란 배가 떠날 준비를 마치자 승객들은 짐을 챙겨 보세구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보세구역 입구의 전광판에는 영어로 "Memory Lost" 라는 문구가 거듭하여 점멸하고 있었다.
누군가 이탈리아어를 영어로 그대로 직역한 모양이었다.
짐작컨대 "유실물에 주의하세요" 나  "잃어버린 물건이 없나 잘 기억해보세요" 쯤 되는 경고를 하려던 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도 라틴어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와 같은 구조를 가진 문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번역이 잘못되면서 그 안내문은 돌연 시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되었다.
영어로는 기억상실, 혹은 잃어버린 기억 정도로 읽힐 그 문장이 내게는 이렇게 보였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돌아보면 지난 시칠리아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이하 생략)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

에필로그를 이렇게 옮겨적은 것은..
두브로브닉을 김영하가 갔다는 것과...
또하나는 그곳을 가기위해 서 있다가...Memory Lost를  봤다는 것이고...
그걸 바로..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로 해석했다는 것이고..
돌아보면 지난 시칠리아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고 생각했다는 것에
감히 멋지다고 말하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또,
나는 왜 모든것을 잃지 않기위해서 이렇게 허둥지둥 살아가는가에 대해 고민하기에 이른다.
얼마전 급작스레 갔던 캐리비안 베이에서, 나는 잠시 어디로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허둥지둥하며 그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고...
또 수경 하나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신경이 곤두섰으며..
락커에서는 오백원짜리 주화를 다시 넣기 싫어서, 직원을 불렀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그날 나의 행동을 주시했던 사람은..
내가 김영하를 거만하게 봤던 거에 비하면 쨉도 되지 않게,
나를 참 한심하게 봤을거라는 생각에 잠긴다.
얼마나 허둥거리고, 못된 표정을 지으며 아등바등했던가 말이다.

내가 정해놓은 틀과 시간에 어긋나면 목소리가 커지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펑펑 울고 싶고..
아직도 나, 그렇게 살고 있다.
 ***
그런데, 로마에서 기차 파업때문에 시칠리아 가는 걸 포기하고...
밀라노까지 가서, 다시 14시간 기차를 탄 후, 배를 타고 시칠리아에 간 작가 김영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고 했다. 그냥 그 대목이 눈물이 난다.
모든것을 다 잃었기에...
잃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경지.
그 독하고 힘든 여정속에서...결국 최후에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고 쓰고 있는 그 글이, 존경스럽고 주옥같이 느껴진 듯.
그리고 느낀다.
지금 나에겐 채우는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다 비우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고..
잃어버리려고 아등바등 하지 않게 될 것임을.

------------------------------------------------------------

모든 것을 다 잃고도 아무 것도 잃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경지.
모든 것을 다 잃었기에 잃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경지...
그런 경지에 올라 요즘의 나를 무심하게 떠올릴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나에게 그런 날이 과연 오기는 올까.
안간힘을 쓰고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내 살을 아프게 찌른다.
움켜쥔 손을 놓으면 그뿐인 것을... 미련하게 너무 오래 쥐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이렇게 하면 잘 될 줄 알았는데..,
큰 걸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다 헛되고 헛되다.

Posted by nuncoo at 03:08 AM | in 문장수집가 | Comments (1)

산들산들-언니네 이발관

"모든 게 사라져 가는데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네."

Posted by nuncoo at 03:02 AM | in 문장수집가 | Comments (0)

자목련블루스 -성기완

주인인 나조차 까맣게 잊고 지내는 내 블로그.....딱히 읊어볼 이야기도 없으니,.....오랜만에  시나 한 편.

자목련 블루스

- 성기완

봄날 오후에 할 일도 없는데


자목련이 흐드러져요.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서


꽃 한 송이 받은 적 없네요.

아 구체적으로 서러워


내 마음


확인도 안하고 떠나셨죠.


봄날 숨 막히는 오후에

퍼플의 물감을 헤프게 쓰는


자목련이 흐드러져요.


꼭 당신이 준 것인 양


한 아름 눈에 들어와


매우 정확히 현실적으로 서운해


구체적으로 서러워


눈물이 나버려

---------------------------------------


오늘은 날씨도 따뜻하던데 곧 봄인가.....

Posted by nuncoo at 04:57 PM | in 문장수집가 | Comments (0)

도쿄타워, 잠수복과 나비, 사랑하기때문에

도쿄 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2005), 릴리 프랭키 (지은이), 양윤옥 (옮긴이),| 랜덤하우스코리아(랜덤하우스중앙)


나에게도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  등록금을 타야할 때라든지, 큰 결정을 내릴 때는 꼭 거쳐야하지만 나의 자질구레한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던 사람.  단 둘이 있으면 왠지 어색했던 사람.
살가운 정을 몰랐던 아버지가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건 아버지 나이 칠순이 다 돼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아침이면 집에 다니러 간 나의 구두를 깨끗하게 닦아놓으셨고 차를 타고 떠나는 나를 향해 아이처럼 손을 흔들기도 하셨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의 따뜻함과 다정한 모습은 떠올릴수록 마음이 아파서 더는 이야기를 잇지 못하겠다.
근엄하게 폼잡고 젠체하던 아버지 옆에는 다섯 명이나 되는 자식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은...순진하고 어수룩한 엄마가 있었다.  엄마이야기도,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움이 사무쳐서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
[도쿄타워] 마사야의 어머니는 아들과 도쿄에 머무르는 동안 평생받을 효도를 다 받은 것 같다고 하셨는데, 나에게는 과연 마사야처럼 엄마에게 효도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화 된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를 먼저 보고, 최근에야 책을 보았는데... 책과 영화 둘 다 마음에 든다.
영화에 깔리던 오다기리 죠의 나레이션, 일기를 쓰듯 꾸밈없이  써내려간 책의 문장들... 그리고 아들과 어머니. 모두.

'아주 어렸을 때 상상해보는 우리 자신의 미래.
가수나 우주 비행사는 못 되더라도 언젠가 우리도 누군가의'어머니'나 '아버지'는 될 것이라고생각한다.
하지만 당연히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당연한 일'이 내게만은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다. 누구에게라도 일어나는 '당연한 일'.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까지 저절로 찾아오는 '당연한 일'이 나에게만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이혼하고 앞으로 평생 서로 만나는 일이 없더라도 나는 어느 쪽이나 다 만날 것이다. 그리고 계속 엄니 곁에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라는 따분한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엄니를 선택할 것이다.
나를 키워준 것은 엄니 한 사람이므로. 아부지는 이따금 돌봐주기는 했지만 존 레논처럼 자식을 키워주지는 않았다. 그러기 위한 시간을 가져주지 않았다. 말과 돈으로는 안 되는 크나큰 것이 있다. 시간을 들이고 수고를 기울이지 않으면 전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다.
아부지의 인생은 큼지막하게 보이지만, 엄니의 인생은 열 여덟살의 내가 보아도 어쩔 수 없이 아주 작게 보였다. 그건 자신의 인생을 뚝 잘라 나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저 아무 일 없는 듯,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먼지를 밖으로 쓸어내지는 못해도 방구석에 밀어놓다 보면 흘러가는 시간이 종이를 겹겹이 붙여 만든 연극 소품 같은 '가정' 정도는 만들어 준다. 하지만 가족관계란 몹시 신경질적인 것이다. 무신경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일수록 실은 신경이 필요하다. 금이 간 거실 벽, 가령 이미 눈에 익어버려서 그것을 웃음거리로 바꿀 수 있다 해도 거기서 확실하게 바람은 들이닥친다. 웃고 있어도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 빨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금간 곳을 메우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금간 곳을 부끄럽게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뭔가 역할을 가진,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나, 부모로서의 나, 아내나 남편을 가진 나. 남자로서의 나. 여자로서의 나. 모든 것에 자각이 필요하다. '

잠수복과 나비- 장도미니크 보비 (지은이), 양영란 (옮긴이), 동문선
[도쿄타워]처럼 나한테는 영화로 먼저 왔던 책이다.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온몸이 마비돼 버린 전 '엘르'편집장 보비는 눈까풀을 20만번 이상 깜빡거리는 것으로 이 책 한 권을 완성해냈다.
그것도 칙칙한 자기연민이나 갑자기 닥친 불행에 대한 원망도, 적개심도 없이 ... 능청스러운 유머와 상상력으로 말이다.
영화를 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아마 큰 감흥없이 책을 덮었을지도 모르겠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는 고난의 상황에서도 낙관하는 인간은 위대하다.  나처럼 긍정의 우물이 얕은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낙관은 꿈도 꿀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가엽기도 하다. 죽지못해서 쥐어짜내는 낙관, 희망...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사랑하기 때문에 (원제 Parce que je t'aime)-기욤 뮈소 (지은이), 전미연 (옮긴이) , 밝은세상
책을 내려놓지 못할만큼 숨가쁘게 흘러가더니 설마..했던 결말로 끝나버렸다.
안나소피 무터같은 바이올리니스트도 나오고 패리스 힐튼이나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거부의 망나니 딸도 나온다.
사람들이 헐리웃 영화에 기대하는 재미를 채워주는 소설. 그 정도.    

Posted by nuncoo at 07:24 PM | in 문장수집가 | Comments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