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이름을 가진 극장

서울 시내 한복판.
그것도 조명상가와 각종 공구상가가 어수선하게 들어선 남루한 청계4가에는 바다극장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이름을 가진 극장. 10여년 전의 그는 바다극장을 이렇게 불렀다.

극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리고 청계2가부터 4가까지를 휘젓고 걸으며
우리는  '바다극장'이라고 이름 지은 주인의 작명센스를 칭찬했을 것이다.
허름하고 칙칙한 분위기도 '바다극장'이기에 운치와 낭만으로 여겨졌다.

그날 본 영화도 기억한다.Dawn.
영화를 보고 난뒤 얼마 동안 나스타샤 킨스키가 나온 Dawn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느냐고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맞장구를 쳐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영화는 극장의 분위기만큼이나 어둡고 우울했었지 아마.
영화에 나온 공간은 호텔의 복도와 객실 내부가 전부.
배우도 여주인공으로 나온 나스타샤 킨스키와 벨보이로 나온 남자배우 딱 두 사람뿐이었다.
혹시 내 기억이 잘못되었나 싶어 IMDB를 검색해보니 역시 맞다.
그 외에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나스타샤 킨스키의 하얀 등. 그리고 블라인드 틈을 통해 밖을 보던 옆 얼굴.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으나 나중에 다니엘 살나브의 '길고도 가벼운 사랑' 을 보며 Dawn을 떠올렸던 걸로 보아 그냥 하염없이 어떤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의 이야기쯤이었나 보다.
 

오늘 대학로로 가는 길을 잘못 들어 두 개 차선만 남은 청계천변에서 30여 분 가량을 맥없이 서 있다가 바다극장을 보았다.
아, 아직도 있었구나.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이름을 가진 극장...

옛 노트에서 2

"금홍아 금홍아 아침에 눈뜨면 내 몸은 젖은 양말 금홍아 금홍아 머리맡 뒤척이면
딱딱한 방바닥과 재떨이,담배 연기 올라가는 천장에 피고 지는 누런 꽃잎들과
생각으로 놀고 있으면 어쩐지 금홍아 금홍아 내 오랜 무릉도원 삼십삼번지에 흐르는
화사한 화장품 냄새와 평생을 보내고 싶어 그럴 때나 내 정신은 은화처럼 맑아
위트도 패러독스도 지금 내겐 없으니 금홍아 금홍아아 꿈은 정말 가위 같아"

이장욱의 시 '금홍아 금홍아 '<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사)> 일부

호두자식

콩은 아주 좋아하는데 두부로 만든 요리는 절대 사절 A.
생선은 아주 좋아하는데 그게 탕이 되면 절대 사절 B.
샐러드에 든 오이는 좋아하는데 짜장면에 얹은 오이는 절대 사절 B.
그렇다면 편식은 요리법에 대한 취향일까? 재료에 대한 취향일까?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1차로 콩을 골라 드신 후에 밥공기를 받아들 정도로 콩을 무지 싫어하는 반면 두부로 만든 음식은 꽤 좋아라 하는 편이다.
콩에 대한 기호도 콩을 골라낼 수 없는 어려운 자리에서는 그대로 꾸역꾸역 집어먹고 그것 때문에 나중에 구역질을 해댄다거나 소화불량에 걸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니 못 먹는다기 보다는 안 먹는다는 말이 맞겠다.
보신탕이나 메뚜기 튀김 같은 건 먹어본 적이 없으니 맛을 논할 처지가 못되지만 누가 그걸 다른 음식인양 속여서 먹이지 않는한 자의로 먹을 일은 아마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만두는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을 정도로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거나 남이 사줘서 하나라도 먹는 시늉을 해야 할 경우에나 젓가락을 드는 음식이고
'대체 저것을 무슨 맛으로 먹을까' 싶은 것이 창의적인 조리과정을 거치지 않은 호두와 잣이다.
빵을 먹다가 호두가 씹히면 그야말로 돌 씹은 기분이다.
수정과에 띄운 잣은 거둬내거나 후후 불어마시면 되니까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반면에 호두아이스크림이나 잣죽은 또, 맛있어하며 먹는다.
출출한 이 밤. 먹을 거라곤 저 호두 투성이의 빵밖에 없는데, 살과 뼈를 분리하듯 빵과 호두를 분해할 일을 생각하니 벌써 손가락에 기름기가 묻어있는 느낌이다.
빵을 완전히 커피에 적신 다음에 죽처럼 되면 호두 알갱이만 숟가락으로 긁어낼까?
이런 호두자식!

평양의 체 게바라

수많은 그의 사진중에 이건 처음 본다.
한글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다.




'A young Korean woman puts the Major’s dancing skill to test. Pyongyang, December 1960' 


이미지 출처:라일락와인의 서재

밤, 빙판길

낮에 흩뿌린 눈으로 길은 이미 빙판길이 되어있었다.
차들이 빠른 속도로 나를 앞질러 갈 때... 길에는 하얗게 눈보라가 인다. 마치 안개 속을 달리는 것만 같다. 엄마와 언니가 쉴새 없이 털어놓는 이야기에 차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렸다. 요즘 우리 가족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죽음' '기사회생'같은 단어들이 귀에 걸려 나는 자꾸 브레이크 밟을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폐렴에 걸린 여자 아이가 입에서 이상한 냄새를 풍기며 쌕쌕거릴 때 엄마는 언니가 죽는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 아이를 들춰업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던 젊은 시절의 엄마와 아버지.
그런데 죽은듯  병상에 누워있던 다섯 살 짜리 여자 아이가 어느 날 새벽에 홀로 깨어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며 앉아있더란다.
"그 어린 것이 글쎄 살아나려고 그랬는지 밖에만 빼꼼하게 내다보고 있는 거라. 그러다 맥없이 누워있다가는 또 밖에만 보고.. 거기에 뭐가 있다고..."
그렇게 다시 살아난 아이는 얼마후 연탄가스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있는 엄마 곁에서 혼자 울다울다 방문을 열어젖혀 엄마를 살렸다고 했다.
"내가 너를 한번 살렸고 니가 나를 한번 살렸다"
모두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다.

외곽순환도로에서 일산 방면으로 가야 하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판교 쪽으로 가고... 나는 내내 갈팡질팡하며 길을 찾지 못한다. 언니와 엄마가 수십년 동안의 가족사를 다 훑고 올라오는 동안에도 언니집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 먼 데 떠났다 오는 사람도 아니고..  처음 오는 길도 아니면서...'
현실로 돌아온 언니가 내가 듣든 말든 상관없이 저 혼자 중얼거리며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이미 어두워진 낯선 동네의 불빛들을 헤아린다. 
죽을 줄로만 알았던 아이. 새벽에 홀로 깨어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던 다섯 살 짜리 여자아이가 언니의 옆모습에 겹쳐진다.

가던 길에서 빠져나와 유턴을 하고 반대방향으로 다시 차를 몬다.
군데군데 불빛에 희번득거리며 드러나는 빙판길. 언니 집으로 가는 길의 방향을 일러주는 이정표. 그래도 여전히 길이 낯설다.
멀리 떠났다가 돌아온듯,
가는 길이 모두 밤길인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