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여자아이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 아이들은 동,식물과 비슷한 대상으로 취급된다.
그들의 인격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카메라를 들이대는 데 주저함이 없어진다는 얘기다.
그날도 하릴없이 나무나 하늘 같은 곳에 집중하고 있을 때
와-하고 아이 두 셋이 튀어나왔다.
모르는 대상을 찍는 것은 그것이 탐색의 방법이기도 하기에 더욱 즐겁다.
'몇 살쯤 되었을까?'
'또 다른 아이와는 남매일까?'
공들여 묶은 머리에선 아이 엄마의 정성이 느껴진다.
더불어, 빗질을 할 때마다 아프다고 칭얼대는 아이와 입에 고무줄을 물고 머리카락 한 올도 남김없이 묶어내느라 힘쓰는
엄마의 모습까지 눈에 보일듯 그려진다.

들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카메라를 발견한 아이가 움직임을 멈추고 카메라 앞에 정자세로 선다.
부탁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서 찍으세요'하는 태도다.





어색하지만 말을 건네본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 말 없는 것이 더 이상하다.
" 사진 많이 찍어봤나보다. 모델 같아"
" 그런 것도 해봤어요"
" 그런 거? 모델?"
" 네, 대회도 나가봤어요"

아이는 오디션을 보는듯한 태도로 똑부러지게 대답하고 당당하게 카메라를 응시한다.
'이래뵈도 나는 프로라구요' 라고 말하는듯한 태도.
똑부러지고 똘똘한 아이임에는 분명하지만 나의 카메라는 호기심을 잃고 금세 풀이 죽는다.
아이가 돌아가려는 찰나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Posted by nuncoo at 11:56 PM | in Diary 2004 | Comments (16) | TrackBack (0)

메신저 접속

오랜만에 MSN 메신저에 접속.
실명인 사람 둘. 아이디로 각자의 근황과 의지를 피력하는 사람 일곱.

아이디 하나씩을 훑어보며 온라인에 없는 사람들에게 나 나름의 방식으로 인사를 건넨다.
모두 무사히 잘 지내냐고.
만약 접속 중이었다면 나에겐 비밀이 없었을 거라고.
가끔 이렇게 시시콜콜 죄다 고하고 싶은 날. 당신들은 약속이나 한듯 모두 어디론가 숨어버렸더라고.

Posted by nuncoo at 03:54 AM | in Diary 2004 | Comments (14) | TrackBack (0)

속속들이 다 들키고

원천징수 영수증이니, 소득증명이니 이런 것만 없었으면 말끔한 하루였다.
협회에서 발급한 재직증명서만으로도 나의 신분을 믿을수 없다니. 발끈해서 한 마디 질러주었다.
" 똑같이 해서 미국은 됐는데, 일본은 안된다구요?"
전화를 끊고나니 우스웠다. 비웃었던 힘의 논리를 이런 데 써먹다니.
어렸을 때 싸우다가 힘에 부친 아이가 "우리 오빠한테 이를거다"  마지막 악다구니를 써대던 꼴 아닌가.

"신분증명, 소득증명을 하라면 세무서 까짓 것 몇 번이고 들락거릴수 있지만 나는 불법체류 같은 거 감행할 정도로  배포 큰 여자가 못되거든요.
주기적으로 이국의 문물이나 풍광을 그리워하고 국외자가 누리는 자유의 달콤한 맛도 찔끔 맛보았지만
말 한 마디 안통하는 내가 거기 가서 뭐..할 게 있을라구요.
내내 떠돌라고 하면 혹할지 모르지만, 눌러앉으라면 ...설마하니 그럴 재간이 나한테 있을라구요."

아까운 휴가 하루가 내 신분증명으로 헛되이 가고 있다 생각하니 '남들처럼 세면도구 챙겨서 어디라도 가는 게 나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면에서 비치는 햇빛 때문에 짜증스러운 표정을 반대편 차선의 운전자들에게 다 들켜버렸던 순간.
'나는 오늘 속속들이 다 들켜버렸구나' 생각하던 순간.
도심 한 가운데서 ... 그녀가 떠올린 음악. 아니 이런 그림.



Booker T. & The MG's의 Soul Limbo ( 1968)


음악은 생뚱맞게 다른 앨범에 있는 곡.



Booker T. & The MG's의 Green Onions (1962) 중에서
Green Onions

Posted by nuncoo at 02:54 AM | in Diary 2004 | Comments (4) | TrackBack (0)

7월 25일 오후2시부터 7시까지의 하늘

오후 2시쯤 파천교 위의 하늘

오후 6시~7시 종로구 통의동 하늘




같은 곳 대림미술관 지붕을 배경으로 한 하늘




창을 통해 내다본 하늘이 아니라
유리창에 비친 하늘. 대림 미술관

Posted by nuncoo at 02:23 AM | in Diary 2004 | Comments (4) | TrackBack (0)

정은임과 동생과 나

약 250여Km의 거리 끝에 있는 집에 가는 길.
동생과 나는 교통방송 라디오 대신 정은임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딸 중에 막내인 나랑도 다섯 살이나 터울이 있는 우리집 외아들.
누나들은 나이가 되면 공부하러, 일하러 서울로 떠나고 그래서 외롭게 컸을 동생이 고등학교 시절 친구처럼, 누이처럼 여겼다는 정은임의 방송이
동생의 핸드폰에 MP3로 담겨있다.

그 섬세한 목소리를 더 잘 듣고 싶어서 핸드폰을 귀에 가까이 댔더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느낌이 살아난다.
'맞아. 옛날... 잠들기 전에 머리맡에 놓고 들었던 라디오에서도 이런 소리가 났지'

뜨거운 여름 오후. 모두들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길은 뻥 뚫렸고 동생과 나는 시속 110Km의 속도로 달리며 정은임을 듣는다.
글의 자간과 행간을 또박또박 짚어가면서 종이위의 여백까지도 읽어주는 듯한 목소리.
동생은 아마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 외로웠던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했을 것이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들으니 좁은 차 안은 온통 그녀의 목소리로 가득찬다.
추억의 밀도가 높아졌다.

그날 남매는 정은임 덕분에 애틋했고, 정은임과 더불어 더욱 애틋했다.


....오래전 마지막 방송..잠깐 듣기- 클릭하세요....

Posted by nuncoo at 01:44 AM | in Diary 2004 | Comments (20) | TrackBa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