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1.
집에서 일터까지 가는 고작 3Km의 길에서도 세 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번에 좌회전 할까? 다음에 할까?
첫번 째 좌회전시 빠져나갈 수 있는 차량은 넉 대에서 다섯 대. 하지만 다음 우회전까지는 거쳐야할 신호등이 많다.
두번 째 좌회전도 상황은 비슷하지만, 상가가 많은 지역이라 자칫 잘못하다가는 불법주차한 트럭 뒤에 발이 묶여 옴짝달싹 못할 위험이 있다.
세번 째 좌회전은 차량이 많은데 비해 신호가 짧다.
길의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어있는 좌회전 차선을 지나치게 되면 혹시나 싶어 그 자리에 마음이 갔다.
처음 몇 번은 택시를 타서도 마찬가지였다.
'신경을 끄자' 눈으로는 창밖을 훑으면서도 머릿 속으론 ' 저 비어있는 좌회전 차선을 두고 왜 직진을 하나' 기사 아저씨가 못마땅하여 '말 걸어도 대답하지 않으리라' 득도 없는 심통을 부렸다.

2.
"내가 이 길은 빠삭한데, 지름길을 많이 아니까 운전이 더 힘들어요.
길을 잘 모를 때는 아는 길로 그저 열심히만 달렸는데 지름길을 많이 알게 되니까 자꾸 머리만 굴리게 돼.
피곤해"
어느 날 만난 택시 기사 아저씨. 첫번 째 좌회전 신호를 그냥 지나친 후 말씀이 길어지신다.
" 바둑도 7급 둘 때는 좋았지.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근데 할 수록 어려워. 돌아가는 게 눈에 읽히거든.
사는 것도 어째 살 수록 어려운 것 같아."

오늘 만난 누군가는 살다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게 간결해지고 단순해지는 시기가 온단다. 그게 바로 고수라고.
결과는 똑같을텐데 먼 길을 에둘러가고, 혼자 엎치락 뒤치락 자기를 닥달하는 건 아직 멀었다는 얘긴가?
아둔해서 그렇든 깨달음이 부족해서 그렇든 진창에서 굴러봐야 그게 진창인줄 아는 나같은 사람한테는 영 가능성이 없는 얘기다.

3. 그림판이라는 걸 처음 써봤다. 그림판을 써보기 위한 포스팅인지도.

Posted by nuncoo at 04:17 AM | in Diary 2004 | Comments (2) | TrackBack (0)

배 날리기

다섯 살 난 조카가 얼기설기 말도 안되게 접어 만든 종이배를 들고 와서 하는 말.
" 이모,  배 날려!"

배를 날리다니 이 녀석 배를 접기는 처음이구나 ..싶지만 배는 비행기처럼 날리는 게 아니라 띄우는 거라고 설명을 한들 알아들을까?
보아하니 누나들한테 무시당하고 따돌림 당하여 나한테까지 온 것 같은데 매몰차게 딴 데 가보라고 할 수도 없고
'너는 물에 둥둥 떠다니는 배 그림도 못보았니? 너희 엄마는 대체 너를 어떻게 거르친 거냐?'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미친 척하고 허공에 종이 배를 던지며, 아니 날리며 놀아주었더니 멀리서 '뭐하는 짓인가' 의아하게 쳐다보던 다른 아이들까지 다 몰려들어 고깔모자도 날고 꽃도 날고 개구리도 날고 .......
지금에 와서 나는..
단지 서술어 하나에 따라 말의 느낌이나 울림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그로 인해  눈 앞에 떠오르는 풍경이나 그림은 상투적인 그것에 비해 얼마나 경이롭고 신선한지를 다시 깨닫고 있는 중이다.

Posted by nuncoo at 11:57 PM | in Diary 2004 | Comments (4) | TrackBack (0)

잠깐이더라구

 무대에 몇 번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더니 청춘이 다 지나갔더라구. 세월 참! 

- 내가 아는 어느 가수

Posted by nuncoo at 03:10 AM | in Diary 2004 | Comments (2) | TrackBack (0)

12분

파울로 코엘료 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을 나누고도 남을 시간.

"당신은 어제 고통을 느꼈고 그것이 당신을 쾌락으로 이끈다는 것을 깨달았소.
그래서 내가 당부하는 거예요.
아픔은 쉽사리 중독되는 강력한 마약이니 그것에 습관을 들이지 말라고.
그것은 우리의 일상 속에, 감추어진 고통 속에, 우리의 체념 속에,
그리고 우리가 흔히 사랑 탓으로 돌리는 우리 꿈의 와해 속에 있어요.
아픔은 본모습을 드러낼 때는 무섭지만, 희생과 체념으로,
또는 비겁함으로 치장을 하면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라오."

- '11분' 중에서 , 파울로 코엘료 - 

Posted by nuncoo at 03:10 AM | in Diary 2004 | Comments (3) | TrackBack (0)

화장실 토크

오늘 어떤 여인과의 화장실 토크

"피곤해 보이네?
"어제 와인바 가자고 해서.. 나만 빠질 수는 없으니까"
"와인바?  요즘엔 왜 그렇게 이상한 게 많이 생기니?  얼마 전에 홍대 앞에 갔다가 문화 충격 먹었잖아. 애들이 어디어디로 나오라는데 거기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겠는거라. 내가 아는 곳을 댔더니 다 없어진 거 있지?"
"우리야 집하고 여기 밖에 모르니까. 그야 말로 서울 촌뜨기지 "
"페밀리 레스토랑이랑 전문 음식점도 별별 게 다 생겼더라? 음식 이름이 어찌나 복잡한지 얼마 전에 갔다가 나, 당황했잖아"
"그것도 그냥 유행.. 트랜드 같아. 90년대 초엔 로바다야끼, 레몬소주 이런 거 많이 찾았잖아"
"로바다야끼도 난 다섯 번이나 갔을까? 그 정도 가니까 싹 사라지고 간판.. 바로 바뀌어버리던데?"
"난 이 건물에서 50미터만 벗어나면 길 잃어버려"
"내가 유일하게 보조를 맞춰가고 있구나 싶은 건 스타벅스 커피 뿐인데, 그것도 종류가 너무 많아서 벅차.
며칠 전엔 누가 '레드망고,레드망고'하길래 '빨간색 망고는 뭐랑 접 붙인 거예요?'하고 물어봤거든? 깔깔깔 웃더라.  즐, 스킨, 도토리... 이런 것도 너무 복잡해. "
" 그러니 살림만 하는 아줌마가 밖에 나가면 얼마나 충격이겠니? 너도 일만 해서 그래."
"보드카페란 것도 있더라? 나는 보드 타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카페인줄 알았잖아. 난 게임이라곤 테트리스 밖에 모르거든"
"그러니까 너는.. 놀이문화는 80년대에서 멈춰버렸고 외식문화는 90년대에서 멈춰버린 거야"
"더 큰 문제는 요즘 유행이라는 것들에 대해서 내가 전혀 흥미를 못느낀다는 거지. 가끔 소외감은 느껴"
"그럼 취향의 문제네"
"글쎄... 그래도 이렇게 살면 안될 것 같고.. 좀 놀아봐야 할까 봐"

70년대에 태어났으나 80년대에 모든 성장이 멈춰버렸다고 생각하는 두 여인.
잠시후 비데 외면하며.. 일반 좌변기가 있는 칸으로 각각 입실.

Posted by nuncoo at 11:58 PM | in Diary 2004 | Comments (6) | TrackBack (0)